이렇게 괴상망측한 책은 처음 본다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책을 받았다. 바빠서 한동안 펴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시간이 조금 생겨 읽어보려고 책을 폈다가 당황해서 한참을 뒤적거렸다. 일단 제일 괴상한 점은 저자가 '곰돌이 푸'라는 점이다. 곰돌이 푸 자체가 실존하는 곰이 아닌데 저자가 곰돌이 푸라니. 

세상에 저자가 없는 책이라는 건 없다. 옛날 책을 새로 편집해서 내는 일은 있어도 원저자와 편집인의 이름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저자가 없었다. 샅샅이 뒤져서 겨우 찾아낸 것이 그나마 '옮긴이'의 이름이다. 이것도 참 괴이하다. '옮긴이'라는 것은 원저가 있는 것을 다른 언어로 옮겼을 때에나 쓰는 말이지, 대체 뭘 옮겼다고 옮긴이? 푸가 한 곰의 말을 사람의 말로 옮겼다는 건가 뭔가. 

굳이 저자를 '곰돌이 푸'라고 하려면, 사실상 푸의 저자 밀른의 책에 나온 푸의 말들을 직접 인용하는 방법도 있긴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저자는 곰돌이 푸가 아니라 밀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 보면 푸가 책에서 한 말이랑은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푸가 한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머리말에서 한 구절, 중간에 나오는 간지에나 잠시 나올 뿐, 푸가 등장하는 건 페이지마다 있는 삽화밖에 없다. 그러니까 대체 어딜봐서 저자가 곰돌이 푸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대체 이 내용들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알 수가 없다. 

괴상망측한 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머리말을 읽어보면, 갑자기 난데없이 푸우가 '논어'를 만났다고 한다. 읭? 이렇게 난데없이? 부제에도 없던 논어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가? 게다가 푸우가 대체 논어랑 무슨 상관인지. 머리말은 말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경전의 혜안을 [그러니까 논어를] 푸의 목소리를 빌려 얘기하는 거라고.그렇다면 이 책은 논어를 푸의 캐릭터를 활용해 귀엽고 쉽게 풀어 쓴 책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일단 원저자는 공자여야 한다. 그리고 논어에 나오는 구절의 원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느 책의 무슨 편에 있는 이야기인지 인용이라도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페이지를 이쁘게 꾸미느라 원문이나 각주를 넣기 싫었다면 맨 뒷 페이지에라도 서지사항이라도 나와야지, 공자에게 마땅한 지적 크레딧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하긴 저자도 자기를 옮긴이라고 하며 뒤로 숨는 판에, 공자인들 자기가 이 책의 컨텐츠의 원저자라고 하고 싶었겠나. 나오는 내용의 예시를 들어 보자면...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내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아무리 노력하고 고민해도 정말 중요한 걸 놓치기 쉽답니다. 내 마음을 먼저 돌아보세요."

"완벽한 사람을 꿈꾼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180도 바뀌기는 힘들 거예요.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끔 작은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정말 간절히 바라며 계속 노력한다면 내가 바라는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줄어들 거예요."

정말 괴이한 것은, 이딴 추상적인 얘기만 페이지 빼곡히 늘어놓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점이다. 대체 왜?!?!?! 그림이 예뻐서? 아니면 정말 이 추상적인 말들이 힐링이 되어서? 책 구성이 예뻐서? 유치원에 온 것 같아서? 


푸 원전 덕후에게는 다소 아쉬운 디즈니 삽화

이 책을 내게 준 사람은 단순히 이 책이 베스트셀러이고 내가 곰이기 때문에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내가 사실 푸의 덕후라는 것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푸를 접하기 훨씬 오래 전 나는 푸를 책으로 접했다. 밀른의 책을 번역했던 계몽사 문고의 '곰 푸우'에는 원저에 있던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삽화가 그대로 옮겨져 있었는데, 디즈니의 그림들보다 모든 캐릭터들이 훨씬 더 민둥민둥하고 단순해서 귀여웠다. 푸와 피글렛도 더 디즈니보다 민둥민둥하지만, 그 민둥한 귀여움이 폭발하는 것은 티거의 삽화에서다. 어쩐지 켈로그 호랑이를 떠올리게 하는 디즈니의 티거와 달리 셰퍼드의 티거는 딱 봐도 푸의 친구인 티거의 모델이 그냥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인형이었다는 것을 더 잘 보여준다. 이요르도 마찬가지다. 당나귀 이요르가 잃어버렸던 꼬리를 못으로 박아주는 장면은 이요르가 인형이라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민둥성(?) 혹은 '인형성(?)' 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사라진다. 즉, 원저자라는 곰돌이 푸는 심지어 밀른의 푸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푸였던 것이다.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푸 삽화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티거 


동화 덕후의 뒷조사 탐방 

그런면에서 본다면 동화 덕후가 동화작가들의 뒷조사를 하여 만든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은 충분히 독자의 덕후력을 상승시킬만한 요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내가 열심히 읽었던 동화들의 주인공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가, 저자는 어디에서 모티프를 얻어 이런 동화를 쓰게 되었는가, 이 동화들이 반영하고 있는 시대상은 무엇인가, 저자의 삶은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책의 성공은 저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작은 아씨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톰소여의 모험, 피터팬, 보물섬, 빨강머리앤, 하늘을 나는 교실, 안데르센 동화집, 그리고 푸에 이르기까지 어렸을 적에 스무번도 넘게 읽었던 동화들을, 저자는 하나씩 시대적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맞춰서 자리매김 시킨다. 작은 아씨들에서 남북전쟁에 나갔던 건 조의 아버지가 아니라 조의 실제 모델이었던 루이자 메이 올콧이었다던가, 보물섬이 이미 해적 시대가 지난지 100년쯤 지나 그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생겨날 무렵에 쓰인 것이라던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에 나타난 인젼조에 대한 인종주의적 묘사라던가. 심지어 이 저자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마크 트웨인 소설의 출판을 맡고 있던 조카사위 찰스 웹스터가 출판사 파산으로 자살하자 딸인 진 웹스터는 고아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게 <키다리 아저씨>라던가 (p.110-111), 피터팬을 쓴 제임스 매슈 배리가 가장 좋아한 작품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철들기를 거부하는 헉의 모험을 보며 피터팬 캐릭터를 구상했다던가 (p.134), 보물섬의 삽화를 그린 월터 패지트는 그 동생 시드니 패지트가 <셜록 홈즈> 삽화를 그릴 때 모델이 되었다던가 (p.152), <빨강머리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에게 마크 트웨인이 팬레터를 보냈다던가 (p. 193) 하는 얘기들 말이다 

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글들에 힐링이란 외관만 덧씌운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와 달리, 이 책은 실제로 푸의 어떤 점이 힐링을 주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장면을 들어 설명한다. 

푸의 집과 피글렛의 집 중간쯤에는 가끔 서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가서 만나는 '생각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없는 날에는 거기에 함께 잠시 앉아서, 만났으니 이제 뭘 해야 할까 궁금해 하곤 했습니다. (p.294)

어느 날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모든 사람이 이 장소가 왜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푸가 시를 지었습니다. (p. 295)

이 몇 문장의 직접인용만 봐도, 푸가 가지고 있는 힐링의 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덕후답게 푸가 주는 힐링의 포인트들을 구체적으로 짚어낸다. 구멍에 낀 푸를 꺼내기 위해 모든 친구가 힘을 모으는 장면이라던가, 꿀을 먹기 위해 구름인 척 풍선을 들고 하늘로 떠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하는 푸라던가, 티거와 푸가 함께 발자국을 추적하느라 몇바퀴를 똑같은 길을 돌았는데 알고보니 자기들의 발자국이더라 하는 에피소드들. 일상성에서 오는 사소한 행복감과 그저 존재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친구들의 친밀성. 아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가 쌩뚱맞은 논어 이야기를 하는 대신, 원전에서 푸가 했던 말들을 몇 개만 추려 인용했어도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힐링을 얻었을 것이다. 원저자가 곰돌이 푸라는 것도 조금 더 납득할만 하고. 


동화를 동심의 세계에서 구출하기

넷플릭스에서 최근 Anne with an E 라는 캐드(캐나다 드라마?)를 방영하였다. 시즌 2까지 나오면서 원작에서 서서히 멀어지긴 했으나, 시즌 1까지는 원작에 나왔던 에피소드를 적절하게 배치한데다가 앤, 다이아나, 매튜, 마릴라 등의 캐릭터를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살려냈다. 1시즌 1화를 처음 본 순간, 책으로 앤을 접한 모든 이들은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빨강머리 앤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말라깽이에 주근깨, 창백하다시피 하얀 얼굴에 반을 차지하는 큰 눈, 상상과 현실 어드메쯤을 헤메고 있는 눈빛, 쉴새없이 조잘거리면서 놀라운 표현들을 드라마틱하게 뱉어내는 앤. 고증에 충실하게도 Anne with an E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직접 가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동화를 현실처럼 구현해 내고자 한 것이었다면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텐데, 이 드라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넷플릭스 캐드 'Anne with an E'

앤이 실제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살고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에 대한 고민을 제작진은 엄청 많이 했을 것이다. 앤이 고아로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왔을 때 겪어야 했을 편견과 차별, 그 커뮤니티 안에 속하기 위해 했어야 했을 노력들까지를 Anne with an E는 세세하게 그려낸다. 다이아나의 엄마가 다이아나와 앤을 못 놀게 했던 것은 단순히 딸기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그저 스토리로서 읽을 때는 단순히 베프인 다이아나와 못 놀게 된 것이 아쉽고 가슴 아팠다면, 현실적인 맥락에 앤을 위치시키고 나니 그런 에피소드 뒤에 있었을 배경이 보인다. 덕후 제작진은 아마 그 뒷배경을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앤의 초경도 마찬가지다. 원작에는 앤이 11살이고 캐드에는 13살로 나오지만, 앤도 분명 초경을 겪었을 것이다. 충격도 받았을 것이고 드라마에서처럼 마릴라에게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발랄하면서도 우울하기도 하고, 과장된 언어를 사용하고, 드라마퀸인데다가 징징거렸다가 금방 들뜨기도 하는 성격이지만, 동시에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해서 몸에 밴 성숙함도 있는 캐릭터가 앤이다. 다이아나의 동생 미니메이의 후두염을 간호한다던가 하는 모습에서 그런 면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성숙함의 배경에는 분명 '고생'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고생. Anne with an E는 거기까지 파고든다. 그래서 앤이 어린 나이에 겪었을 정신적 육체적 학대까지 그려낸다. 이것은 앤의 독특한 성격 - 상상력이 유달리 풍부하고 현실을 떠나 꿈 속에 있는 것 같은 - 에 맥락을 부여한다. 즉, 앤이 만들어내는 상상과 환상의 세계가, '고생'을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쯤 되면 빨강머리앤의 팬들 - 특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팬들 - 은 '이건 나의 앤이 아냐!' 라고 충격과 공포에 빠져든다. 그러나 애니메이션보다 책을 수십번쯤 읽었던 원전 덕후로서, 나는 오히려 이 드라마가 앤 이야기에 현실적인 맥락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동화가 그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아름다운 것으로만 남길 바란다면, 동화는 아마 아름다운 채로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아우라를 뿜으며 그대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화를 현실의 반영으로 읽기 시작한다면, 동화는 여전히 내 현실과 일상과 세계 속에 살아 숨쉬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사랑했던 동화들은, 그 동심의 아우라 속에서 빠져나왔을 때도 충분히 보석처럼 빛난다.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선택을 하겠지만, 나라면 보석처럼 내 일상의 지금 이순간에 빛나고 있는 그 동화들을 붙잡겠다. 

갑자기 넷플릭스의 캐드 얘기를 해서 당황스럽겠지만, 이 책도 사실 같은 맥락의 책이다. 우리가 수십번씩 읽었던 그 책이 작가의 어떤 삶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식을 학대하다시피 했던 올콧의 아버지나, 앤 시리즈를 그 딸인 릴라 이야기까지 써야했던 몽고메리, 피터팬의 모델이 된 소년의 비참한 말로, 톰소여의 인종주의와 안데르센의 리플리 증후군이 그 동화들이 가지고 있던 동심의 아우라를 흐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가들의 비루하다면 비루한 삶을 통해서도 이런 동화가 만들어지고, 그 동화가 또 후대에 두고두고 읽히며 나에게까지 닿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의 현재의 비루한 현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내 비루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동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내게는 힐링이다. (곰돌이 푸인 척 하는 공자가 늘어놓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힐링이 아니라 이게 힐링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정말 안데르센의 컴플렉스인가요?

미운 오리 새끼는  제목에 무려 '새끼'가 들어가는 어린이에게 다소 적합치 않은 제목을 가진 안데르센의 대표작이다. 어렸을 때는 그저 아 놀림받던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되다니 정말 잘 됐다 정도로 생각했다면, 크면서는 점점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게 미운 오리 새끼는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놀림받는 존재다. 백조 새끼가 딱히 오리 새끼보다 더 못생겼을 이유도 없건만, 다른 오리 새끼들이 백조 새끼 (아니 미운 오리)를 따돌리는 이유는 그저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백조 새끼는 어떻게든 오리들의 세계에 끼어들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닌다. 그런데 오리들의 기준은 백조와는 다르다. 아무리 백조가 노력해도 오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백조인데도 불구하고 오리들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했던 백조 새끼는 결국 자기가 백조라는 걸 알게 된다. 오리들과는 다르게 살도록 디자인 된 백조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미운 오리 새끼>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놀림받고, 남들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깎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수많은 백조새끼들이, 자기만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기 삶을 살기 위해 날아오르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게 안데르센의 컴플렉스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자기가 귀족의 자제이며 천재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런데 천재는 맞는 거 아닌가? 미운오리 새끼도 그렇고 성냥팔이 소녀도 그렇고 벌거벗은 임금님도 그렇고 이 정도면 난 놈이지), 미운 오리가 딱 그렇다는 것이다. 오리새끼가 따돌림 당하는 이유는 못생겼기 때문이고, 오리 새끼는 외모지상주의 세상의 가치관을 본인도 받아들이며, 고난의 극복도 주인공의 별다른 노력도 없이 알고보니 백조였다는 식으로 결말이 나는데, 이것은 안데르센이 가진 '나는 애초에 귀한 혈통을 가진 존재인데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과 지내다보니 인정받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라는 안데르센의 무의식이 반영된 거라는 것이다. 저자의 뒷배경을 아는 것은 종종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저자의 삶이 '컴플렉스'라는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없듯이 그의 작품도 그의 독특한 기행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삶과 책의 내용을 연결짓기 위해 작위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인데, 저자는 안데르센의 열등감과 천재라는 자신감, 불안감과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벌거벗었음에도 행진을 계속하는 왕의 캐릭터를 통해 나타나며, 귀족들이 자신들의 지위에 걸맞은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멍청하다는 사실을 까발렸다고 한다. 신선한 해석이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역시 작위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자는 안데르센에 대한 전기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안데르센이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이자 비천한 배경, 불확실한 성정체성,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으며 못생긴데다가 눈치도 없는 사람이었고, 그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안데르센을 너무 쉽게 프로파일링 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웃사이더라면 누구나 비참한가?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이 평생 독신으로 사는 건가? 친구집에서 머무르다가 그 친구 부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언은 오히려 그 친구부부와의 친밀감을 보여주지는 않는가? 벌거벗은 임금님도 사실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할 때 혼자 보이는 대로 사실대로 말한 소년으로 인해 금기가 깨지는 통쾌함에 대한 얘기가 될 수는 없는 걸까.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해도 좋다는, 비주류여도 괜찮다는, 비주류의 거친 시각이 때로는 주류가 눈감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는, 그런 이야기로 해석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안데르센을 '비주류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누가 봐도 사회의 비주류였던 그와 그의 고통을 그저 비참한 컴플렉스의 화신으로 치부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시각이 조금 불편하다. 마이너리티는 분명 매저리티가 볼 수 없는 시각으로 사회를 바꿔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키다리 아저씨도 써 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즐겁다. 왜냐하면 덕후가 자기가 덕질하는 것들을 눈빛 빛내며 설명할 때 느껴지는 그 매력이 책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키다리 아저씨>에 나온 아저씨가 알고보니 사회주의자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충격은, 단순히 충격이 아니라 설렘이기도 했다. 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던 역사와 연결되는구나- 하는 기쁨이기도 했고, 마치 별세계 얘기와 같았던 주디의 이야기를 그 시대적 맥락에 위치시킬 때 현실감이 반짝반짝 살아올랐기 때문이다. 우울한 수요일과 주디가 그린 삽화로 시작하는 그 즐거운 책의 뒷배경을 더 알고 싶다. 어디 <키다리 아저씨> 뿐이랴. 메리 포핀즈를 쓴 트래버스의 이야기도 꽤나 드라마틱하고 (그 뒷이야기가 Saving Mr. Banks라는 영화로 나왔는데, 사실왜곡과 디즈니 미화가 심하다고 말이 많았다), 어린 왕자라던가, 책에도 언급되었던 에밀과 탐정, 어렸을 때 사랑했던 동화는 정말 무궁무진한 꿀잼 확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키다리 아저씨를 머리말에 언급했으니, 아마 이 책이 성공하면 다음 책도 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오늘의 주절주절 길기도 한 리뷰는 여기서.... 


끗.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