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테르에서 시나몬 뿜뿜 시리즈를 지르면서 나를 유혹한 다른 향들은, 바로 츄러스 향과 진저브레드 향이었다. 둘 다 시나몬이 어느 정도 들어간 향이라서 궁금했다. 사실 시나몬 향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도 크리스마스가 생각나기 때문인데, 진저브레드는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쿠키이기 때문이다. 

데메테르 진저브레드

데메테르 진저브레드

보라. 사진이 얼마나 예쁘냐. ㅎㅎ 크리스마스 분위기 뿜뿜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향은 말하자면 로투스 쿠키 같은 약간 시나몬 향이 나는 과자 향이었다. 

그러나 실제 시향해 본 바로는... 일단, 뿌리는 순간 과자 반죽 냄새가 난다. 혹시 컵케이크를 구워 본 일이 있다면 알 것이다. 컵케이크를 오븐에 넣기 전에 나는 과자 반죽의 향인데, 주로 밀가루와 설탕의 향이다. 일단 뿌리자마자 그 냄새가 치고 올라오는데, 다소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과자반죽 향이니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뒤로 갈 수록 밀가루 비린내만 남는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합성 비린 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미니 스프레이로 구한 것을 감사하며... 진저브레드는 노땡큐.

데메테르 츄러스

데메테르 츄러스

그렇다면 츄러스 향은 어떠한가. 역시 이미지를 보라, 이 츄러스의 이미지와 거기서 연상되는 향을. 츄러스를 자주는 못 먹지만 아주 좋아한다. 전형적인 겉바속촉에 코끝을 스쳐가는 시나몬과 설탕 향. 그런데 이걸 향수로 만들다니! ... 라는 마음으로 샀다. 

역시 시향해 본 바로는... 일단 여기서는 최소한의 과자 냄새도 나지 않는다. 기묘한 합성향인데, 분명한 건, 여기 시나몬 향이라고 넣은 것은 분명 지난번에 시향한 그 시나몬 바크 향에 넣은 향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아아주 비슷한 계열의 향이 난다. 대체 어디서 파는 무슨 츄러스를 가지고 향수를 만드신 것인지. 여튼 츄러스 너도 노땡큐. 

이렇게 데메테르에서 지른 미니스프레이 향수들 시향을 전부한 듯 하다. 그 기념으로 굳이 시상식을 해 보자면, 제일 마음에 들었던 1위는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시나몬 토스트다. 이 향수에서는 내가 머릿속으로 연상한 그대로의 향이 나고, 시나몬 향도 달달한 향도 정직하게 구현이 되어 있다. 당분간 향수 살 생각은 없지만, 이 중에 하나를 골라서 산다면 시나몬 토스트. 국내에서도 팔고 있다. 2위는 시나몬 번인데, 시나몬 토스트와의 차이를 전혀 모르겠다. 3위는 프레시 브루드 커피. 되게 고급진 커피향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커피 냄새가 정직하게 구현된 향수. 네번째는 펌킨 스파이시 라떼다. 역시 연상했던 그 향이 그대로 나서 신기할 정도다. 

반면, 과자 시리즈(츄러스, 진저브레드)는 대략 실패. 그리고 시나몬 바크도 영 아니올시다. 

애초에 시나몬 향에 끌려서 데메테르 미니스프레이들을 지른 만큼 시나몬 시리즈들을 다 시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해 보는 데메테르 시나몬 뿜뿜 시리즈. 12월에 뿌리고 다닐 시나몬 향들이다. 

제일 먼저 궁금했던 데메테르 시나몬 바크 (Demeter Cinnamon Bark). 한국에 없는 향이었다. 제일 궁금했던 이유는 사진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가장 정직한 시나몬 향일 것 같아서였다. 달달함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정말 저 시나몬 스틱 향이 날 것 같아서. 그런데 의외로 세 개의 시나몬 향 중에 제일 인위적인 향이 강했다. 처음 뿌렸을 때는 약간 인위적인 화장품 냄새 같은 것도 좀 나고. 시나몬 향은 분명히 나는데 첫 향이 좀 아쉬웠다. 그래서 셋 중에는 제일 불호인 걸로. 

데메테르 시나몬 바크

 

데메테르 시나몬 토스트(Cinnamon Toast)데메테르 시나몬 번(Cinnamon Bun)의 경우, 사실 둘의 차이를 거의 모르겠다. 이걸 쓰는 지금도 왼손에는 시나몬 토스트를, 오른쪽에는 시나몬 번을 뿌리고 향을 맡고 있는데, 둘 다 시나몬 향이 강하고 둘 다 적당히 달달한 향이 함께 난다. 노트 정보를 보면 시나몬 토스트에는 시나몬, 웜스파이시, 너티 어코드가 있고, 시나몬 번에는 거기에 바닐라, 락토닉, 파우더리, 스위트가 더해진 것 같은데, 솔직히 달달함에는 큰 차이가 없고 그렇다고 시나몬 번에서 바닐라나 우유향이 강하게 나지도 않아서 솔직히 정말 차이를 모르겠다. 양손을 번갈아 맡아가면서 굳이 차이를 얘기하자면, 시나몬 번이 더 세고 지속력이 강한 게 느껴진다. ㅎㅎ 여튼 거의 같은 향수로 느껴지는 수준.

데메테르 시나몬 토스트와 데메테르 시나몬 번

참고로 시나몬 토스트는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고, 시나몬 번은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다. 시나몬 번을 뿌리고 싶은 사람에게는 시나몬 토스트와 거의 다를 바 없으니 시나몬 토스트를 사서 뿌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ㅎㅎ

여튼 데메테르 시나몬 향에 대한 총평을 하자면,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데메테르는 정말로 향 구현에 정직하구나. 커피향이라고 하면 커피향이 나고, 시나몬향이라고 하면 시나몬향이 난다. 예전에 샀던 애매한 Rain 향이라든가, 애플 블로썸 같은 애매한 향은 되려 인위적인 향이 강한데, 시나몬 쪽은 빼박 시나몬.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그 시나몬 향이 난다. 시나몬 토스트와 시나몬 번은 특히 더 마음에 들었는데, 인위적인 느낌 없이 시나몬 향 + 달달한 향이 나고, 생각한 것보다 달달함은 적어서, 오히려 이쪽이 내가 시나몬 바크 향에게 기대했던 향에 가까운 것 같다. 

겨울, 특히 12월에 뿌리고 싶은 향이지만, 사실 조말론 히노키 앤 시더우드와 함께 레이어링해서 뿌려 봐도 재미있을 듯하다. 히노키 앤 시더우드에서도 시나몬 향이 약간 나는데, 아주 약간이라 좀 아쉬웠다. 여기에 시나몬 향을 레이어링 해 보면 어떨까? 궁금하네. ㅎㅎ 겨울에 해 보고 업데이트하겠다. ㅎ

한동안 바카라루주 540에 꽂혀서 봄여름 내내 뿌리고 다녔다. 나도 개인적으로 향이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한 학기 동안에도 서너 사람이 지나가다가 향수 이름 뭐냐고 물어본 듯. 남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는 레어한 향수다. ㅎㅎ 다 쓰면 또 사고 싶은, 제 2의 인생 향수. 

데메테르는 미국에 있을 때 시도해 봤던 향수다. 온갖 향들이 있어서 재미있지만 단일 노트라 단조로워서 향수로서의 기능보다는 재미 기능이 강한 향수. 그런데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 취향이기도 하다. ㅎㅎ 이 블로그에도 있지만, 처음 데메테르 향수를 시도했을 때는 비(rain)향 같은 걸 잘못 사는 바람에 물비린내로 고생도 했었다. ㅎㅎ 그런데 데메테르를 또 건드리게 된 이유는, 작년 샤보 레꽁썽드레 이후로 음식향을 구현한 구어망드 향수에 꽂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도 우유향 같은 걸 궁금해 했었고, 커피 브레이크는 커피향에 꽂혀서, 히노끼 앤 시더우드는 시나몬향에 꽂혀서 샀었는데, 그럼에도 확실한 커피향, 확실한 시나몬향은 아니어서 약간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데메테르에는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데메테르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니 시나몬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3개였다. 시나몬 바크, 시나몬 번, 시나몬 토스트. 문제는 한국에서 팔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결국 미국에서 귀국하는 동생네 집으로 미니 스프레이 향수들을 부탁했다. 검지손가락 크기만 한 5ml짜리 미니 스프레이들은 그렇게 하늘을 날아 한국에 도착했다. 

이번에 동생이 사다준 향수는 시나몬 바크, 시나몬 번, 시나몬 토스트 이렇게 시나몬 시리즈랑, 그 외에도 시나몬 향이 나는 과자 계열, 츄러스, 진저브레드, 그리고 시나몬 향이 날 것 같은 음료 계열인 펌킨 스파이스 라떼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나몬과는 관계 없지만 궁금해서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프레시 브루드 커피 향. 아마도 하나씩 리뷰를 올리게 될 듯 하다. 

오늘 리뷰하려는 향수는 데메테르 프레시 브루드 커피 (Fresh Brewed Coffee) 향이다. 

데메테르 프레시 브루드 커피

데메테르는 향 구현에 굉장히 정직한 편인데, 딱 그런 향수가 바로 프레시 브루드 커피 향이었다. 옛날에 엄마가 타주던 맥스웰 하우스 가루커피, 뚜껑을 열면 훅 하고 풍겨오던 그런 향이다. 너무 대놓고 '커피' 향이라서 웃음도 났다. 메종 마르지엘라 커피 브레이크는 느끼한 크림라벤더 커피 느낌이 언뜻 언뜻 풍겨나와서 킁킁거리면서 탐색해야 하는 느낌이었다면, 이건 앞으로 굴러도 뒤로 굴러도 커피 향. 다만, 커피 향은 이상하게 자칫 잘못 맡으면 담배향 같기도 해서 조심스럽다. ㅎㅎ

여튼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자주 뿌리게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커피 향 내고 싶은 날 기분전환차 뿌리면 딱 좋을 듯 하다. 

그리고 또 다른 음료향수. 데메테르 펌킨 스파이스 라떼.

데메테르 펌킨 스파이스 라떼

미국에서 가을 되면 스타벅스에서 파는 시즈널 음료 중 하나였던 펌킨 스파이스 라떼. 나는 거의 사 먹지 않았지만, 매장에 가면 항상 시나몬 향기와 함께 스파이시한 냄새가 나곤 했다. 그 향기가 바로 펌킨 스파이스 라떼의 향. ㅎㅎ 이 향수 역시 향 구현에 충실하다. 정말로 딱 펌킨 스파이스 라떼 향. 개인적으로 나는 좋아하는 향이라서 가끔씩 기분전환으로 뿌릴 것 같다. 

두 향 다 머릿 속에 생각하는 그 향에 아주 충실하고, 둘 다 마음에 든다. 

메종 프란시스 커정은 평소에 관심 갖던 향수 브랜드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향은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바카라 루쥬 540을 시향해 보게 되었는데 오 좋네~ 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 해외에 나가게 된 김에 공항에서 맡아 보았다. 

탑 노트: 샤프론, 자스민 

미들 노트: 앰버우드, 앰버그리스 

베이스 노트: 퍼 레진, 시더

바카라 루쥬 540

바카라 루쥬 540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EDP이고 다른 하나는 엑스트레. 엑스트레는 빨간 병에 담겨 있다. 두 개 다 시향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시향지에 하나씩 각각 뿌려 줬는데, 둘 다 유사하게 느껴졌지만 엑스트레가 좀 더 발향력이 강한 느낌. 그래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직원이 살에 직접 뿌려 보라는 것이다. 살에 뿌리면 또 향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손목에 뿌려 달라고 했다. 코에 댔을 때 어쩐지 향이 미미해서, 발향력이 약한 향수구나~ 하고 생각했다. 

여튼 그 상태로 공항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손목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았는데, 어머! 요구르트 향이! 아니 요렇게 상큼하고 달달한 요구르트 향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돌고 돌다가 다시 아까 시향했던 데로 돌아가서 다시 향을 맡아 보았다는... ㅎㅎㅎ 

탑노트: 샤프론, 자스민 이런 거 하나도 모르겠다. 솔직히 꽃 냄새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향수 후기에서 사람들이 가끔 쇠향이나 치과향이 난다고 하는데, 나는 그 향이 탑노트에서 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향은 앞에 언급했듯이 내 코에는 상당히 미미하게 느껴지는 편. 그래서 향수를 뿌린 거 맞아? 싶을 정도로 아주 옅게 치과향 같은 게 나고... 그리고 탑노트에는 달달함은 거의 안 느껴진다. 다만 탑노트는 금방 날아가고 10분~15분만 지나도 달달한 미들노트가 나기 시작한다. 

미들노트: 이 향의 매력은 미들노트에서 훅 치고 나오는 요구르트 향. 갑자기 상큼 달달한 요구르트 향이 훅 난다. 과하게 달지 않다. 아무래도 내 코에는 미미한 그 쇠향/치과향이 지나치게 달지 않도록 향을 잡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은 달고나 향이 난다고도 하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내 코에는 그래도 요구르트 향에 가깝다. 이상하다. 우리가 아는 그 야쿠르트는 사실 싼 맛에 먹는 음료인데, 이 향은 꽤 고급지고 세련되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향이라는데 내 코에는 극호다. 

베이스노트: 지속력이 꽤 길다. 요구르트 향이 연하게 가라앉으면서 피부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인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살에 남아있다. 지속력이 김에도 불구하고 향이 인위적이지 않아서 좋다. 

총평: 굉장히 마음에 드는 향수였다. 상큼 달달해서 봄에 뿌리기도 좋을 것 같다. 상큼 달달하다고 해서 마냥 젊은 층을 위한 향수 같지 않은 게 이 향수의 장점인 것 같다. 달달함을 적당하게 잡아주는 다른 향들과의 미묘한 조합 때문인지, 3040 중년이 뿌리기에 더 적당할 것 같은 느낌 (과 가격대 ㅜ_ㅠ ㅎㅎ). 뿌리다 보니 엑스트레도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건 더 비싸던데. ㅎㅎㅎ

 

 

 

벨망 밀크

자판기 우유향이라는 말에 혹해서 시향해 봤으나, 제 코에는 너무 인위적인 향이 강했어요. 구어망드 향수들은 인위적이지 않을수록 좋은 것 같다. 여튼 벨망 밀크는 향수병도 예쁘고 했으나 향 자체는 대략 실패. 

우유 향을 좋아한다. 우유맛 아이스크림 향도 좋아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유 향 향수들도 이거저거 시향해 봤었다. 하지만 우유 향이라고 해도 사실상 머스크 향에 가까운 것도 많았고, 우유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거저거 섞여 있는 향수들도 많아서, 여태까지는 딱 마음에 드는 향수는 없었다. 그나마 몇 번 뿌리고 다녔던 게 불가리 쁘띠 에 마망이나 하라주쿠 러버스 베이비 정도.

그런데 얼마 전 이 향수를 접하게 되었다. 우유향 향수로 유명하다는 샤보 레 꽁상트레 (Chabaud Lait Concentré). 이름이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프랑스어로 연유(condensed milk)를 뜻하는 말이다. 

노트 정보는 아래와 같다.

탑노트: 밀크

미들노트: 코코넛

베이스 노트: 카라멜

샤보 레 콩상트레

직접 시향해 본 후기는 다음과 같다. 

....내가 찾던 바로 그 우유 향이다!!!! ㅎㅎㅎㅎ 드디어 찾았다, 내 취향저격의 우유 향 향수! 

솔직히 탑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의 구분이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일관된 향이 끝까지 쭉 간다. 그 일관된 향 안에 우유향, 코코넛향, 카라멜 향이 다 난다. 후기들 찾아 보면 우유사탕이나 우유맛 캐러멜 같은 향이라고 하는데, 그렇다, 그런 향이다. 엄청 달달해서, 단 걸 안 먹어도 단 걸 먹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향이다. 딱 연유 향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오르는 향수다. 

어렸을 때 엄마가 집에서 얼음을 직접 갈아 팥빙수를 해 주곤 했는데, 그 때 위에 연유를 한 숟갈 퍼서 휙 뿌려 주곤 했었다. 그래서 냉장고 안에는 캔에 담긴 연유가 있었는데, 암묵적으로 엄마만 손댈 수 있는 연유 캔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이를 먹으면서는 머리가 커져서, 나는 가끔씩 밤에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마루를 걸어 냉장고에 가서 연유 캔에서 연유를 한 숟가락 퍼 먹곤 했다. 그때 느꼈던 바로 그 향!! ㅎㅎ

그리고 20대 중반, 듣기 싫은 교직 수업을 7개나 들어야 했던 우울한 봄 학기. 유달리 싸늘하던 교육관 구석에 있던 커피 자판기가 있었는데, 그 학기에 그렇게 따뜻한 자판기 우유를 뽑아 먹었다. 그나마 그거 뽑아 먹는 기쁨에 가기 싫은 나 자신을 후려쳐서 교직 수업을 들으러 가던 생각이 나네. 그런데 그 자판기 우유랑 비슷한 냄새가 난다. 

어쨌거나 나는 너무도 취향 저격인 향수라 시향하면서 내내 감탄했다. ㅎㅎㅎ 그래, 이거였어, 내가 찾던 우유 향은. 유일한 단점은 한국에서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과, 가격이 좀 있다는 것. 뭐.. 아껴서 잘 쓰면 되지. ㅎㅎㅎ

다만, 완전 식품의 냄새이기 때문에, 먹을 거 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ㅎㅎ 

아크로 디스커버리 세트에 서비스로 딸려온 아크로 다크 샘플을 시향했다. 사실 한동안 아크로에 손이 가지 않았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글을 써야 하는 날이고, 그런 나 자신을 달래기 위해 향수 시향을 하면서 글 쓰기로 하였다. 

아크로에 한동안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웃기게도, 지속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나는 특이하게도 지속력이 짧은 향수들을 좋아한다. 지속력이 너무 강하면 쉽게 질리고, 그 이후로 당분간은 뿌리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말론을 좋아하고, 지속력이 짧은 걸로 유명한 레플리카 커피 브레이크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ㅎㅎ 여튼, 아크로는 지속력이 긴 향수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다. 지속력이 길어도 너무 길다. 지난번에 아크로 어웨이크 향수를 시향했을 때는 도서관에서의 6시간뿐 아니라 집에 와서도 내내 났고, 심지어 샤워를 한 뒤에도 손등에 그 잔향이 남아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혹시... 깨끗하게 씻지 않아서일까...? ㅎㅎㅎ) 사실 아크로 베이크는 궁금했던 향이라서 예전에 시향을 시도했었는데, 너무 달고 느끼한 향이 세게 나서 결국은 시향 중단. ㅎㅎ 조만간 또다시 시도해 보겠다. 

아무튼, 아크로 다크는 초콜렛 향이라고 한다. 어쩐지 다크는 베이크만큼 힘들지 않을 것 같아서 시도해 보았다. 

향수노트 정보는 아래와 같다. 

탑노트: 다크 초콜렛

미들 노트: 코코아

베이스 노트: 바닐라

향수노트는 그렇다고 하는데, 시향한 후의 느낌은 이렇다.

이게 어딜 봐서 초콜렛 향이라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뿌리고 나서 느껴지는 첫향은 탄내다. ㅎㅎㅎ 어떤 탄내냐면,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에서 나는 탄내랑 비슷한데, 레플리카에는 좀 더 달고 스파이시한 향이 포함되어 있다면, 아크로 다크는 전혀 달지 않다. 그래서 단향 빠진 레플리카 첫향과 비슷하고, 굳이 표현하자면 탄 군고구마 껍질에서 날 법한 향이 난다. ㅎㅎ 개인적으로 파이어 플레이스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향 자체는 싫지 않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초콜렛 향이라고 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미들 노트에서는 코코아 향이 나야 하건만, 여전히 내게는 조금 옅어진 탄내...ㅎㅎㅎ  베이스 노트가 바닐라라면 어느 시점에서는 단향이 치고 나와야 하는데, 미들노트까지도 단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베이스 노트는 바닐라라고 하는데, 아주 약간 단내가 느껴질 법도 하다. 여러모로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 냄새랑 비슷하지만, 탄내의 잔향이 더 오래 가고, 바닐라 향은 훨씬 엷은 편이다.

총평: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의 탄향을 좋아하면서도 너무 달달한 바닐라 향이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나쁘지 않을 향수다. 내 취향에도 나쁘지는 않았다. 현재로서는 딱히 좋지도 않은 게 문제이긴 하지만. ㅎㅎ 확실히 파이어 플레이스보다는 더 얌전하고 가라앉은 향이다. 여자 향수보다는 남자 향수에 가까운 듯 한다. 초콜렛 냄새는 끝까지 나지 않았다. 

 

디스커버리 세트에 들어있던 아크로 라이즈를 시향해 보았다. 피나콜라다를 마시며 즐기는 여름밤의 향이라는 아크로 라이즈. 

향수 노트 정보는 아래와 같다. 

 

탑노트: 코코넛 워터

미들노트: 피나콜라다, 티아레 플라워

베이스 노트: 샌달우드

아크로 라이즈

 

시향을 해 본 소감은 다음과 같다. 

탑 노트: 아... 위험하게도 첫 향부터 약간 물향이다. 아무래도 코코넛 워터 노트 때문인 것 같다. 그와 함께 예전에 랑방 메리미에서 맡았던 것 같은 달디단 열대꽃의 향이 낮게 깔린다. 물향을 어느 정도 희석해 주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물비린내를 잘 못 견디는 편이라서, 내가 지속적으로 쓰기에는 글렀다. ㅎㅎ

미들노트: 피나 콜라다의 향이라고 하기에는 파인애플 향이 약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열대과일이나 열대꽃을 생각나게 하는 은은한 달큰함이 감돈다. (이게 티아레 플라워인지는 잘 모르겠다.) 

베이스 노트: 달큰한 향이 점점 가라앉으면서 우디한 향이 주된 노트가 된다. 하지만 달큰한 향의 잔향이 우디한 향의 건조함을 잘 잡아 준다. 우디한 향이 가라앉고 나면 다시 코코넛 워터의 향이 엷게 남는다. 아니 이게 웬 수미쌍관 향수인가. ㅎㅎ 의외로 미들노트보다는 잔향에서 피나콜라다인지 요구르트 냄새인지 모를 상큼한 냄새가 언뜻언뜻 나기도 한다. 

총평: 어디 동남아나 하와이 등지로 여행 가서 밤에 꽃 향기 맡으면서 칵테일 한 잔 하는 여름밤의 느낌은 확실히 전달해 주는 향수다. 랑방 메리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좋아할 듯하다. 꽃과 과일의 향이 달큰하면서도 은은하게, 낮게 깔리는데, 장미향처럼 훅 치고 들어오거나 달달함이 과하지 않아서 되려 차분한 느낌이다. 다만 첫 향부터 났던 그 코코넛 워터의 물향은 약하지만 꾸준히 지속된다. 열대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름 이 조화를 고급지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열대과일의 향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물 향을 괴로워하는 나는 약간 괴롭. 그래도 잔향이 꽤 파우더리하고 귀여웠고, 미들 노트에서 느껴지지 않던 상큼한 파인애플 향 같은 게 좋았다.

계절 추천: 이미 향수에서 너무 여름향이 진득해서 여름에 뿌리면 오히려 멀미가 날지도 모른다. 사실 여름의 향이 설레게 느껴지는 시절은 봄이다. 그것도 아직은 살짝 날씨가 쌀쌀한 봄. 아마 4월쯤이나 5월 초쯤이 어떨까. 아직 반팔은 아니고 얇은 트렌치 코트 정도 입고 다닐 시점에 뿌리면 여름을 기다리는 설렘이 향을 더 돋보이게 해 줄 것 같다. 게다가 살짝 나는 요구르트 향, 그리고 꽃냄새 때문에 봄이라는 계절이랑도 잘 어울릴 듯 하다. 

아크로 베이크는 사실 아크로 시리즈를 시향할 때 제일 기대가 되었던 향이다. 아무래도 케이크 냄새가 난다는 시향 정보들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 저녁에 별 생각 없이 뿌렸다가 너무 느끼한 향에 충격! 그때 씻어낸 후 한 동안 시향 후기를 미루게 되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아크로 시리즈 중에 마지막으로 시향 후기를 올리게 되었다. 

일단 향수 노트 정보는 다음과 같다. 

탑노트: 레몬 껍질

미들 노트: 샹틸리 크림, 프롤린

베이스 노트: 브라운 슈거, 바닐라

 

아크로 베이크

시향 후기는 다음과 같다. 

탑노트고 미들노트고 베이스노트고 뭐고 무조건: 레몬 파운드케이크 향이다. 확실히 강한 건 레몬향이다. 시트러스 향은 가끔 세제를 떠올리게 해서 조심스럽지만, 이 레몬향은 결코 세제 같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달달함과 함께 느끼한 버터 냄새가 함께 나기 때문이다. 버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름기 많은 레몬 파운드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먹었을 때 입으로 쭉 들어오는 빵기름 같은... 그런 향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상큼하면서도 컵케이크나 파운드 케이크에서 날 법한 맛있는 향이 훅 풍겨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느글거린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TPO가 중요한 향수인 것 같다. 일단 여름에는 절대 뿌리면 안 되는 향수다. 봄이나 가을도 권하지 않는다. 꼭 겨울에 뿌려야 하는 향수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식사를 풀 코스로 먹고 디저트로 다 먹은 후에 뿌리는 건 권하지 않는다. 그러니 꼭 배고프고 추운 겨울에 밖에서 사람을 만날 때 뿌려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사람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근처에 어디 컵케이크 가게가 있나 하고 돌아볼 것이다. 내가 가진 향수 중에 가장 달달한 향수이고, 뿌리고 나면 후각적으로 방금 막 단 걸 먹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니까 뭔가 맵고 짠 음식을 먹은 후 디저트가 땡기지만, 다이어트 때문에 단 걸 먹을 수가 없거나 돈이 없어서 디저트까지 사 먹을 수가 없을 때 뿌리면 마치 디저트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향수다. 

총평: 개인 취향에는 물향도 꽃향도 없어서 나쁘지는 않지만, 자주 뿌리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는 위에 쓴 것 같이... 뿌리면 안 되는 상황이 꽤 많을 것 같아서. 내가 가진 향수 중에 제일 달달한 향수이고, 어떤 면에서는 컵케이크 집에서 날 것 같은 향이라서 사랑스럽기도 한데, 사실 향수 촥 뿌렸을 때 첫향이 꽤 느끼하다는 것만큼은 각오하고 뿌려야 할 향수이다. 

향탐기록이 또 많아지는 이유는 요즘에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글을 쓰고 있어서다. 아침마다 나 자신을 후려쳐서 도서관에 앉혀 놓아야 하는데,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그게 참 쉽지 않다. 그런 나를 일으켜 세우는 가장 좋은 전략은 '채찍'과 함께 '당근'을 주는 것이다. 요즘 나의 '당근'은 도서관 구석에서 향수를 뿌리고 중간중간 킁킁 냄새를 맡아가며 일하는 것. 글 쓰는 데 딱히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집중력을 흩트려 트리기 때문에 좋다. 물론.... 글 쓰다가 미뤄 놓고 이렇게 향탐기록을 쓰는 것은...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렇다. 하지만 길게 쓰지 않을 거다. 짧게 휘리릭 써 놓고 사라질 거다. 

아크로 어웨이크

커피 향수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게 된 아크로 어웨이크. 커피 향 중에서도 평이 좋아서 향이 너무 궁금했지만 블라인드로 지르기엔 위험할 것 같아서 신세계에서 2ml짜리 디스커버리 세트를 비싸지 않은 가격에 구매했다. 디스커버리 세트에는 어웨이크, 라이즈, 베이크 세 개가 들어 있는데, 다크 2ml를 서비스로 같이 보내 줬다. 다 궁금했던 향이라서 좋다. 역시 향수 탐색은 디스커버리 세트가 짱이야.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드는 대로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싸게 살 기회가 있을 때 지르면 되고, 마음에 안 들면 안 드는 대로 2ml만 마저 쓰면 되니 얼마나 좋아. 나머지도 도서관에 오는 날마다 틈틈이 뿌려가면서 시향기록을 올리도록 하겠다. 

노트 정보를 찾기 어려웠지만 겨우 찾아서 쓰자면...

탑노트: 커피

미들 노트: 카다멈

베이스 노트: 베티버 

....라고 한다. 이렇게 심플할 수가. 그러나 이것도 찾기 어려웠는데 겨우 찾은 거다. 

 

시향 후기:

탑노트: 헤이즐넛 커피 원두 향이다. 커피 브레이크와 달리 정말로 앞구르기 세 번 하고 뒷구르기를 한 뒤에 맡아도 커피향. 그런데 이상하게 짭짤하고 달면서 씁쓸한 스파이시한 향이 같이 난다. 카다멈일까. 커피향은 좋지만 이 향이 약간 개인적으로 불호다 (약간 커피 쩐내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담뱃재 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향을 자주 뿌리게 될까? 묵직하고 남성적인 느낌이다. 

미들노트: 달콤함이 사라지고 우디한 향과 함께 약간 짭짤한 스파이시 향이 남는다. (이거 카다멈일까?) 

베이스노트: 꽤 우디한 나무 냄새가 난다. 그리고 커피의 잔향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짭짤하게 남는 스파이시한 향이 여전히 조금 쩐내같은 느낌 ㅜ_ㅠ) 그래서 굳이 묘사하자면, 오래된 나무 책상에 며칠 전 커피를 흘렸는데 닦아냈지만 그럼에도 나무결 사이로 커피가 스며들어서 나무에 배어서 계속 나는 냄새 같은... (너무했나? ㅎㅎㅎ) .... 그것보다는 조금 더 향긋한...? ㅎㅎㅎ 여튼, 오래 된 나무도, 나무 책상도, 커피 냄새도, 오래된 커피 냄새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베이스 노트는 나쁘지 않다에 한 표다. 그리고 얼핏 오래된 커피 사탕 냄새 같기도 하다. 왜 그 틴캔 같은데 들어 있는 커피 사탕, 오래 두면 나는 냄새 같은 것. 

총평: 커피 향수라는 데에는 전혀 이견이 없다. 이게 카다멈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중간에 나는 짭짤 씁쓰레한 스파이시 향만 없었더라면 좋아했을 향이다. 특히 탑 노트의 헤이즐넛 향은 원두를 갈았을 때 나는 냄새와 유사해서, 만약에 누군가가 커피 향수를 찾는다고 하면 나도 추천했을 법한 향수다. 다만, 중간의 그 씁쓸 짭짤 스파이시가 개인적으로는 불호라서, 자주 뿌리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덧: 지속력이 어마어마하다. 집에 와서 씻고 난 다음에도 손에서 커피 냄새가 날 정도. ㅎㅎ 나는 사실 지속력이 약한 향수를 좋아해서,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마이너스.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설렘을 동반한다.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떻게 사계절이 없는 곳에서 그렇게 오래 버텼는지 잘 모르겠을 만큼 계절변화를 즐기고 있다. 계절별 수세미를 떠서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계절마다 어울리는 다른 향수를 뿌리며 계절변화를 만끽하곤 한다.

향탐기록을 시작한지 벌써 몇 년이 훌쩍 지났고, 향알못이던 나는 여전히 향알못이지만, 그래도 내 취향의 향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좀 생겼고, 몇 년째 애용하는 향수들도 생겼다. 그래서 오늘의 포스팅은 계절별로 나눠 본 내 최애 향수 조합이다.

봄에 뿌리는 향수

딥티크 필로시코스: 무화과 향 향수다. 무화과는 맛도 좋아하고 향도 좋아한다. 필로시코스에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한 과일냄새가 나서 좋다. 다만 봄에 뿌리는 이유는, 생 무화과를 칵 밟았을 때 날 법한 빳빳한 풀냄새 때문이다. 필로시코스의 이미지는 내게는 연녹색 어린 잎파리같은 느낌이다. 잔디가 돋아나고 잎이 자라기 시작하는 봄에 뿌리면 기분 좋은 향수다. 

조 말론 블랙 베리 앤 베이 +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나에게 시그니쳐 향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 두 향수의 조합이다. 정말 오랫동안 이 두 향수의 조합을 썼는데 아직까지도 질리지 않아서 둘 다 벌써 여러 번째 사는 중. 사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뿌리지만, 블베베의 달달한 과일향 때문인지 봄이나 초여름에 뿌리기 좋고, 잉오헤는 사실 가을에 더 잘 어울리는 향수지만 시원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봄, 여름에도 레이어링하기 좋다. 

여름에 뿌리는 향수

프레시 헤스퍼러스 그레이프 프루트: 자몽향의 향수다.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라 상큼하면서도 자몽향의 쌉쌀한 느낌이 있어서 너무 달지 않다. 프레시의 장점은 가볍고 향이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레시를 좋아했는데... 한국에서 철수하다니. ㅜ_ㅠ 프레시에서 가장 좋아했던 향수는 브라운 슈거인데, 이제는 단종이 된 건지 한국은 커녕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어서 아쉽다. 

조 말론 오우드 앤 베르가못: 사실 이것도 사계절 다 쓰는 향수에 가깝지만, 시원한 나무 냄새라서 여름에 쓰기 좋다. 오래 전 대학생 때 친한 선후배들이랑 답사 가서 넓은 마루 누각에 누워 잠이 들었을 때 날 법한 그런 냄새라 그런가 보다. 

가을에 뿌리는 향수

조 말론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오래 전에도 포스팅한 것 같지만, 조 말론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향수 자체는 정말 가을과 잘 어울리는 향수다. 낙엽 냄새, 헤이즐넛 콱 밟았을 때 날 법한 숲 냄새 같은 게 나기 때문이다. 

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 사실 군밤 냄새라서 겨울에 뿌리기 좋은 향수지만 가을 향수로 분류한 이유는, 군밤 냄새에 설렐 시점은 겨울보다 가을이기 때문이다. 너무 초가을에는 어울리지 않고, 날씨가 막 추워지기 시작할 10월 말, 11월 초쯤에 뿌리면, 뿌리는 순간부터 설렘설렘하다. 

겨울에 뿌리는 향수

조 말론 히노끼 앤 시더우드: 시나몬 향이 훅 풍겨나는 바로 그 향수. 이제 완전 겨울이구나 싶은 날씨부터 크리스마스까지 뿌리면 설렘설렘한 향수다. 작년에 처음 사서 뿌려 본 향수지만, 몇 번 더 뿌려 보니 점점 더 마음에 드는 향수. 스파이시하고 우디한 향이다. 

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커피 브레이크: 이건 뿌리다 보니 완전 겨울 향수다. 기본적으로는 우유와 바닐라 베이스라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여름에 뿌리면 죽음이다 싶은 향수다. 그러니까 꼭 날씨가 추운 날에만 뿌려야겠다. 

 

이 향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커피 향 때문이다. 가끔 커피집에 갔을 때 원두 볶는 냄새가 나거나 하면 너무 좋아서, 대체 저런 향은 왜 향수로 안 나오는 걸까 하고 검색해 보다보니 커피 향수라고 나와 있는 게 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 커피 브레이크였다. 그래서 노트를 찾아 보는데, 노트 정보가 웹사이트마다 다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향수 노트가 복잡한 향수이기 때문에 마르지엘라 공식 사이트에 있는 향수노트 정보와, 퍼퓸 그라피에서 가져온 정보를 병기한다. 

탑노트: 커피 어코드, 레드 애플 어코드, 레몬 에센스 (마르지엘라) / 페퍼, 오렌지 블라썸, 패츌리 (퍼퓸 그라피)

미들 노트: 라벤더 에센스, 스피어민트 에센스, 오렌지 플라워 (마르지엘라) / 라벤더, 커피, 통카 빈 (퍼퓸 그라피)

베이스 노트: 밀크무스 어코드, 샌달우드 어코드, 시더우드 (마르지엘라) / 바닐라, 시더, 베티버 (퍼퓸 그라피) 

사실 노트 정보만 보면 다 내가 좋아하는 향이다. 커피 향도 사과 향도 좋아하고, 라벤더나 민트 향도 좋아하고, 우유향도 좋아하고 시더우드나 샌달우드 향도 좋아한다. 그래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향을 할 수가 없어서 시향 후기를 찾아 보니, 시향 후기는 노트 정보만큼이나 웹사이트마다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커피향이 안 나니 기대하지 말라고 하고, 누구는 그래도 커피 향이 치고 올라온다고 한다. 누구는 라벤더 향이 너무 강해서 방향제 같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헤이즐넛 라떼같이 우유향이 강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우디 향이 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나무 향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튼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매우 달달한 향수라는 것 정도였다. ㅎㅎ

결국 여의도 '더 현대'에 가서 시향을 제대로 해 봤고, 그런 후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서 현대카드 M point로 50%를 할인해서 샀다. 뭐 이럴 때 쓰려고 M point 모으는 거지 뭐. 30ml를 사고 싶었지만 단종이 된 건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100ml로 지르고 말았다. 암튼 앞으로 주구장창 뿌리고 다니게 될 예정이다. 

시향해 보니 어땠냐고? ㅎㅎㅎㅎㅎㅎ 

탑노트: 커피 브레이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도, 첫 향은 알싸하고 쌉쌀하다. 아무래도 페퍼 향인 듯하다. 후추같이 스파이시한 향이지만 가만히 맡아 보면 아주 엷게 달달한 향도 나는데, 스피어민트 껌에서 나는 상큼한 달달함에 가깝다. 

미들 노트: 쌉쌀한 페퍼의 향이 좀 사그라들면서 얇게 바닥에 깔린다. 미들노트 내내 이 약간의 쌉쌀함은 남아 있다. 거기에 약간 붕 뜬 것 같은 라벤더 향이 올라온다. 하지만 꽃냄새가 되게 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때부터 바닐라가 얇게 깔리면서 커피 냄새가 좀 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엄마가 어디서 프랑스 커피믹스 같은 것을 선물 받아서 집에서 마신 적이 있는데, 내가 아는 커피믹스에 비해 고소함이나 짠맛은 덜하고 대신 느끼하고 달달한 느낌은 더 강했다. 딱 그런 크리미하고 달달한 프랑스 커피믹스 느낌의 커피 향이다.  거기에 스피어민트 향이 치고 나온다. 이렇게 다채로운 향이 섞여 있다 보니 때에 따라 제일 강하게 느껴지는 향이 다르다는 게 싱기방기한 점. ㅎㅎ

베이스 노트: 잔향에서는 우디한 향이 많이 난다. 그래도 미들노트에서 남은 바닐라 향과 우유향, 향긋한 스피어민트 향의 잔향이 남아있어서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디한 향마저 사라지고 나면 거의 우유향에 가까운 라떼 향만 남는데, 이게 꽤 오래 간다. 자기 전에 손등에 뿌리고 잔 다음에 아침에 일어나 맡아 봐도 부들부들한 우유향이 잔향으로 남아있다. 

총평

뿌리면 뿌릴 수록 마음에 드는 향수다. 처음에 뿌렸을 때만 해도 뭐 그럭저럭 좋긴 하지만 되게 마음에 든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워낙 변화무쌍한 향수여서 그런지 계속해서 뿌려 보게 되고, 뿌릴 때마다 제일 진하게 느껴지는 향이 달라서 알쏭달쏭한 기분. ㅎㅎ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자기 전에도 뿌리고, 공병에 소분한 뒤 밖에 나가서도 틈틈이 뿌리고, 하도 열심히 뿌려대서 100ml 짜리 병에 있던 향수가 이제 반밖에 안 남았다. (지속력이 약해서 그만큼 다시 자주 뿌리게 되는 것도 있다.)

여러 향이 뒤섞여 있어서 변화무쌍하고 재미있는 향수라는 생각이 든다. 스파이시하고 알싸한 향 + 달달한 커피우유 향 + 우디한 향 + 스피어민트의 상큼한 향 + 붕 뜬 것 같은 라벤더 꽃향까지 전부 다 맡을 수 있는 향수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향이 섞여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조화가 잘 되어 있다. 우유 향의 느끼함은 알싸함이 잡아주고, 우디향의 건조함은 향긋하고 달달한 우유와 스피어민트 향이 잡아주는 식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뿌릴 때마다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처음 뿌렸을 때는 커피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커피 향수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일하다가 무심결에 훅- 하고 커피 향이 풍겨 오는 것이었다. 또 라벤더 향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 이거 라벤더 향인데? 하고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무엇보다 드라마틱했던 건 스피어민트 향인데, 자기 전에 손등에 뿌리고 자다가 무심결에 향을 맡았는데 웬지 맡은 적 없는 상큼달달한 향이 나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 과일냄새인가? 하고 계속 맡다 보니 어쩐지 껌냄새. 그리고 그때야 깨달았다. 스피어민트 향이라는 것을! ㅎㅎㅎ 스피어 민트 껌에서 나던 스피어민트 향. 그때까지는 한번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떻게 맡게 되었지? 여튼 이게 커피 브레이크의 신기한 점인 것 같다. 정말 변화무쌍한 향수인데, 그 모든 향이 다 마음에 든다는 것. 뿌리면 뿌릴 수록 마음에 드는 향수라는 것. 다 쓰고 나면 재구매 의사 있다. 다만 지속력은 빵점이라는 걸 기억하자. 

계절 추천: 바닐라 향 때문에 역시 겨울에 뿌려야 좋은 향수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늦가을이나 초봄. 초봄이라고 굳이 말하는 이유는, 2월이 다 끝나가지만 나는 계속 뿌리고 다니고 싶기 때문이다. ㅎㅎㅎ 자기 전에 뿌리면 변화무쌍하게 변해가는 향을 맡다가 곱게 잠들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새로 이사 온 도시에는 도무지 향수 시향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백화점 근처의 본가에 살 때는 동선이 어떻게든 백화점을 통하게 되어 있어서 오며가며 시향도 해 보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해외 나갈 일이 있을 때 면세점에서 킁킁 대는 거 말고는 향수 시향을 할 일이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향수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메종마르지엘라 레플리카의 '온 어 데이트''커피 브레이크'가 그랬다. 향수 노트들을 보면 내가 좋아할만한 향수인데, 시향을 해 보지 못했으니 내가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온 어 데이트'는 신세계몰에서 저렴하게 파는 미니어쳐를 찾아서 질렀고 잘 써 보고 있지만, '커피 브레이크'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서울 본가에 갔을 때 백화점에 가 봤지만 레플리카 매장은 사라진 듯 했다. 

여튼 궁금해서 이런저런 블로그들을 읽던 중, 번개장터에서 향수를 구매했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번개장터가 중고마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 사람들이 선물받았거나 샀지만 손이 안 가는 향수들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파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살다 보면 그런 향수들이 생긴다. 내게도 그런 향수들이 있다. 하나는 선물받은 향수였는데 나는 별로 좋아하는 향이 아니라 개봉하기 전에 조 말론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향으로 교환했고 지금은 잘 쓰고 있다. 또 다른 친구에게 선물받은 향수는 예전에 써 봤는데 이미 질린 향이라서 상자를 뜯지도 않은 채 서울 본가에 갖다 두었다.  조카에게 줄까 했는데, 언니가 아직 조카에게는 향수 선물하지 말라고 해서 선물도 못하고 박스 채로 그대로 남아있다. 어떤 것들은 친구가 쓸 때 몇 번 뿌려봤는데 좋아서 벼르다가 샀는데, 이상하게도 잔향이 너무 오래 가고 금방 질려서 영 손이 가지 않는 향수도 있다. 향수에도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에 그 기간을 넘기면 결국은 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나마 최선은 주변에 그 향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을 때 친구 쓰라고 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유통기간이 지나기 전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번개장터에서 중고로 향수를 거래하는 것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향수들을 처분하기에 딱 좋을 테니 말이다. 물론 중고로 구매하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부담은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번개장터에 들어갔는데, 내가 찾는 '커피 브레이크'를 5만원에 파는 곳이 있었다. 게다가 개봉도 안 한 새 제품이라고 했다. 개봉을 안 한 새 제품이라면 판매자가 이상한 다른 향수로 채워넣을 일도 없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후기를 보니 전부 5점 만점에다가, 대부분의 후기에서 '정품이에요' '향이 똑같아요'와 같은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향수는 정품이고 병행수입이라서 싼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 볼만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커피 브레이크'를 질렀다. 

커피 브레이크는 며칠 안 되어 도착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정품 박스에 비닐도 안 뜯은 채였다. 나는 비닐을 뜯어서 상자를 열었고 손목에 몇 번 뿌려 보았다. 훅- 하고 바닐라 향이 뿜어져 나왔다. 생각한 것보다 바닐라 향이 세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품이랑 박스도 똑같았으니 정품이겠지 싶었지만,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각종 블로그에 정품과 가품을 구분하는 방법이 여러가지 나와 있었다. 레플리카의 경우 일단 박스에 있는 숫자가 각인된 방식이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향수에 붙어 있는 라벨의 글씨도 훨씬 흐릿하다고. 박스를 확인해 보니 블로그에 나와있는 가품 박스와 각인 방식이 똑같았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레플리카 정품 향수들과 향수병도 비교해 보았다. 라벨지의 재질도 달랐고 프린트 된 글자도 달랐다. 자세히 보니 스프레이 부분도 다르게 생겼다. 가품이었다. 이미 번개장터에서 '구매확인'을 누른데다가, 시향한다고 몇 번 뿌려도 보았던 터라 아쉬웠다. 더 찾아보니, 가품 향수들에는 어떤 화학용품이 들어갈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뿌리면 안 된다고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이 '향수 가품'의 세계는 정말 방대하다는 것이었다. 즉, 해외의 어느 공장에선가는 작정하고 가품을 만들고, 정말 정품과 유사하게 박스를 프린팅하고 라벨을 붙이고 해서 유통하고 있는 것이었고, 국내의 유통업자들은 이런 가품 향수들을 번개장터에서 대거 판매하고 있는 것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나는 번개장터에 후기를 남겼다. '잘 살펴보니 가품인 것 같네요. 이미 구매확인을 눌렀고 몇 번 뿌려 보았기 때문에 환불은 못 하겠지만 아쉽습니다.' 굳이 후기를 남긴 이유는, 나같은 사람이 또 없길 바랐기 때문이다. 가품인 것 같다는 후기가 하나만 있었어도 아마 나는 향수를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후기들에서 다 정품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하고 지른 거였다. 그런데 판매자의 댓글이 달렸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따로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는 댓글이었다. 의견이라니. 향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의견의 문제일 수 있어도, 정품과 가품이 의견의 문제인가? 라고 생각했다. 5만원을 날린 게 속상했지만, 가품과 정품을 구분할 줄도 모르는 주제에 번개장터에서 함부로 향수를 지른 나의 멍청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판매자에게 쪽지가 왔다. '선생님, 공식 수입 상품을 원하시면 백화점을 가셔야 합니다. 정품 공장이 해외에 많은데 국내 상품이랑 비교하시고 악평은 난감하네요.' 라고 왔다. 악평이라니. 그래서 '가품을 가품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악평이라니 당황스럽다-'고 답을 남겼다. 정품이라고 우기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해외 정품 공장에서는 라벨지도 다른 걸로 붙이나요?' 라고 하면서 나는 덧붙였다. 솔직히 나 빼고는 서로 다 가품인 줄 알고 사고 팔고 있는데 내가 번개장터에 무지했구나- 하고 상점 신고하려다가 참은 거라고. '하지만 가품을 정품이라고 우기시면 그건 사기가 됩니다.' 나는 덧붙였다. 말씀하신대로 앞으로는 백화점으로 가겠다고. 그랬더니 다시 답이 왔다. '그걸 떠나서 선생님, 저한테 연락을 먼저 주셨으면 조치를 드렸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는 말했다. 환불처리를 해 주겠다고. 그래도 환불 처리를 해 주겠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주말에 여의도에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메종 마르지엘라 매장이 있는 '더 현대'에 들렀다. 향수 매장은 따로 없었지만 의상 매장 구석에 향수도 몇 가지 팔고 있었는데, 그 중에 '커피 브레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시향지에 '커피 브레이크'를 뿌려서 들고 다니면서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 노트를 맡아 보았다. 가품으로 왔던 그 향수와는 완전히 다른 향이었다. 탑노트부터 훅 치고 들어왔던 바닐라향도 정품 향수에서는 심하지 않았고, 커피 향도 은은하게 풍겨왔고, 가품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던 라벤더 향도 꽤 강했다. 달달한 향수라는 것 외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월요일에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판매자였다. 그는 환불해 주는 대신 후기를 삭제해 달라고 했다. 즉, 환불은 조건부였다. 그제야 나는 왜 그의 평점이 5점이었는지, 왜 상점후기에는 가품이라는 지적이 단 하나도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후기를 삭제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후기는 감정이나 공격이 섞인 '악평'도 아니었고, 그저 단순하게 가품임을 지적했을 뿐이었다. 그 후기를 삭제해 달라는 것은, 가품이 가품이라는 걸 속이려고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후기를 남기는 것은 소비자로서 나의 당연한 권리라고 얘기했다. 환불을 해 주시면 내가 후기에 '그래도 환불을 해 주셨다'는 내용은 덧붙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어차피 환불을 해 주면 거래 자체가 사라지면서 후기가 자동으로 삭제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내일 환불처리를 하면 내일 바로 후기가 삭제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한테 왜 후기를 삭제하라고 전화까지 하신 건데요?'라고 묻자, 그는 그 하루 동안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시스템상으로 환불 후 자동으로 후기가 삭제되는 거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나 스스로 후기를 삭제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하루 만에 후기가 삭제되는데 그걸 못 견뎌서 전화를 하신 거라면, 하루 정도는 참으셔라.' 가품을 팔았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후기를 삭제하지 않으면 환불을 해 주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5만원은 내게도 큰 돈이고, 멍청비용 치고도 비싼 비용이었다. 그러니 그걸 돌려받을 수 있다면 물론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돈으로 소비자를 입막음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환불을 해 줄지 안 해 줄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멍청비용을 그대로 치루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럼 그렇게 하시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하면서 결국 다시 환불을 해 주겠다고 했다. 그와 통화하는 사이에 이미 상품은 수거가 된 상태였다. 

하루만에 환불을 해 줄 수 있다고 했지만 번개장터에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쪽지를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물건은 수거상태였고, 환불을 해 주고 해 주지 않고는 그의 양심에 달려 있는 문제였다. 내가 독촉하거나 사정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여러모로 바빴다. 해외에도 다녀오는 일정도 있어서 여기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번개장터에서 환불처리가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거래취소가 되면서 내 후기는 자동으로 삭제가 되었다. 그의 상점 후기는 다시 5점들로 채워졌다. 환불은 받았지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같은 사람들이 200명에 1명 꼴로 있다고 했다. 즉, 199명은 가품인 줄 알고도 사서 쓰기도 하고 선물하기도 하거나, 정품인 줄 알고 행복하게 잘 쓰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번개 장터에서는 향수를 사면 안 된다. 후기는 삭제 되었지만, 블로그에라도 남긴다. 

 

 

 

 

 

'온 어 데이트'라는 이름이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데이트가 있다면 뿌리고 나가고 싶은 이름의 향수다. 하지만 이름보다 더 끌렸던 것은 향수 노트였다. 와인 향이라니! 

탑 노트: 블랙커런트 와인, 베르가못

미들 노트: 장미, 제라늄, 다바나

베이스 노트: 패츌리, 오크 모스, 머스크

데이트 중에 포도밭을 산책한 것인지, 혹은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신 건지는 알 수 없겠지만, '온 어 데이트'의 탑노트는 와인향이다. 그래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와인을 못 마시는 주제에 와인 향을 좋아한다.  ㅎㅎㅎ 그래서 겨울이 되면 뱅쇼를 마신다. 

레플리카 온 어 데이트

시향을 못 해 아쉬워 하고 있던 중 신세계 몰에서 7ml짜리 '온 어 데이트'를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디스커버리 세트로 나온 것인데 개별적으로 판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격대를 보니 만원대라서 그냥 질러 버렸다. 배달 음식 한 번 덜 먹으면 해결될 정도의 가격이다.

뭔가 엄청 귀여운 것이 도착했다

그랬더니 뭔가 엄청 귀여운 것이 도착했다. ㅎㅎ 박스도 레플리카 박스랑 똑같이 생겼는데 아주 조그마한 게 귀엽다. 스프레이가 아닌 스플래시 타입이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원래 미니어쳐들은 대개 그렇다. 여튼 간만에 향수 미니어쳐를 보니 귀염 뽀짝하다. 

레플리카에도 디스커버리 세트가 있는데, '온 어 데이트'는 판매자가 개별 판매하기로 한 것 같다. 나는 디스커버리 세트가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7ml는 향수 하나를 경험해 보기에 딱 좋은 양이기 때문이다. 같은 향수라도 어떤 타이밍에 어떤 날씨에 뿌리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 백화점에서 시향해 보는 정도로는 그걸 알기 어렵다. 또 내 체향과 섞였을 때 잔향이 어떤지 얼마나 가는 지도 시향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향수는 시향했을 때는 좋았지만 실제로 뿌리고 다니다 보면 잔향이 끈덕지게 늘러붙어 질려 버리는 경우도 있고 (조말론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가 나한테는 그랬다), 그리고 어떤 향수는 시향했을 때는 그냥 그렇다 생각했지만 몇 번 더 뿌려보다 보니 마음에 들어 사서 잘 쓰기도 한다 (조말론 오우드 앤 버가못이 나한테는 그랬다). 그런데 7ml는 그 모든 것을 파악하기에 딱 적당한 용량이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향이라도 몇 번 더 시도해 보기에 넉넉한 용량이고, 마음에 드는 향이라면 계속 뿌리고 다닐 수 있고, 만약에 7ml를 다 썼는데도 계속 생각이 난다면 큰 용량으로 사서 쓰면 되니까. 

레플리카 디스커버리 세트

다만 레플리카 디스커버리 세트에 있는 향들은 내가 다 이미 알고 있는 향들이다. 레이지 선데이 모닝과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는 이미 소장하고 있고, 재즈 클럽은 예전에 샘플을 써 봤는데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디스커버리 세트는 나한테 소용이 없는 걸로. ㅎㅎ

여튼 '온 어 데이트' 시향 후기를 남기자면 다음과 같다.

탑노트: 첫 향은 알코올 향이 세다. 그래서 잠시 알코올이 빠진 후 맡는 게 좋다. 20초쯤 지나고 맡아 보면 포도맛 풍선껌같은 향긋한 냄새가 훅 치고 올라온다. 이게 와인 향인가 보다. ㅎㅎ 물론 와인향이라고 하면 와인향으로 쳐 줄 수는 있을 정도의 향이지만, 지나가다가 맡았는데 '어? 어디서 와인 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포도향 향수라니 신선해서 탑노트는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미들노트: 미들노트는 장미향이 강하다. 데이트니까 장미향이 나는 것도 이름과는 어울리지만 개인적으로 인공적인 장미향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나한테는 그냥 그런 걸로. ㅎㅎ 향수에 들어가는 꽃 향들은 대개 나하고는 잘 맞지 않는다. 

베이스 노트: 베이스는 거의 머스크다. 향수의 머스크 베이스 노트는 약간 질려서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냥 머스크가 아니라 아까 그 포도맛 풍선껌 향도 좀 향긋하게 남아있어서 향긋한 머스크 정도 되겠다. 나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는 탑 노트가 마음에 들고, 잔향도 나쁘지 않았으나, 미들 노트의 장미향이 조금 취향에 맞지 않았다 정도. 그래도 7ml를 다 쓸 때까지 부지런히 뿌려 볼 의향은 있다. 7ml를 다 쓴 후에는 또 살 일은 없을 것 같은 향수다. 

오랜만에 향탐 기록을 쓴다. 거의 4년만인 것 같다. 그 사이에 내 선반에는 또 예전에 시향기록을 쓰지 않은 많은 향수가 생겼다.

여전히 쓰고 있는 향수는 역시 조말론이다. 블랙베리 앤 베이는 질릴 듯 하면서도 질리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왜냐하면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는 결국 30ml 한 통을 다 쓰기 전에 질려 버리고 말았는데, 블랙베리 앤 베이는 100ml 한 통을 다 쓰고도 자꾸만 생각나서 또 결국 한 통을 질렀고, 여전히 잘 쓰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도 전혀 질리지 않아서 다 쓴 다음에 재구매 했다. 그리고 여전히 최애 조합은 블랙베리 앤 베이 +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조합이다. 블베베는 연구실에 놓고 쓰고 있고, 잉오헤는 집에 두고 쓰고 있는데, 레이어링을 하고 싶을 때는 집에서 잉오헤를 뿌린 후 연구실에 가서 블베베를 뿌려 덧입히는 식이다. 

여전히 사랑하는 조말론 향수 중에는 오우드 앤 베르가못이 있다. 이것 역시 예전에 샀던 50ml 한 통을 다 쓰고, 다시 50ml를 구매해서 쓰고 있다. 인텐스 코롱 계열이라서 비쌌지만, 해외에 나갔다 올 일이 있을 때 면세점에서 질러 버렸고, 여전히 잘 쓰고 있다. 여전히 인텐스 코롱 계열은 남자 향수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우디한 향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 몇 년 사이에 취향이 바뀌어 좋아하게 된 향수도 있다. 딥티크 필로시코스는 예전에 텁텁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주로 봄과 초여름에 많이 뿌린다. 빳빳한 새 풀 냄새 아직 초록기 가득한 과일 냄새 같은 게 나서 좋다. 그러면서도 무화과 향답게 부들부들하고, 너무 달지 않아서 좋다. 블랙베리 앤 베이와 함께 연구실에 두고 가끔 뿌리는 향수다. 

요즘같은 늦가을 초겨울에 가장 애용하는 향수는 여전히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다. 역시 평범하지 않은 향이지만,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나는 파이어 플레이스가 좋다. 특히 날씨가 쌀쌀해지는 초겨울에 맘을 설레게 하는 군밤 냄새가 난다. 약간 음식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려는 향수는, 첫눈이 내리고 12월로 접어들면서 좋아하게 된 향수, 조말론 히노끼 앤 시더우드다. 올 여름에 해외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면세점에 들렀다가 질러 버렸다. 히노끼는 편백나무고 시더우드도 우디한 향이지만, 이상하게 시나몬 향 같은 게 난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눈이 휭 돌았다. 시나몬 냄새라니! 완전히 100% 시나몬 냄새는 아니지만 뭔가 그 비슷한 매운 스파이시 향이 나고, 교보문고에서 맡아 본 거 같은 편백나무 향도 섞여있다. 그래서 역시 남자향수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시나몬 냄새라니!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설레기 시작하는 시점, 즉 11월 후반부터 12월에 뿌리고 다니면 웬지 인간 크리스마스가 된 기분이다. 

지금 찾아 보니 사이프레스 앤 그레이프 바인이나 머르 앤 통카 등과 레이어링하면 좋다길래, 지금 양쪽 손에 하나씩 뿌리고 맡아 보는 중인데, 사이프레스 앤 그레이프 바인과 레이어링하면 매운 향이 훅 강해지는 느낌이라서 좋다. 이열치열같은 느낌이다. ㅎㅎㅎ 머르 앤 통카와 레이어링하면 머르 앤 통카의 달달한 향이 히노끼의 매운 향을 적당히 잡아 주면서 좀 더 향수 같은 향이 난다. 하지만 어차피 매운 맛에 뿌리는 향수라면 그레이프 바인 쪽이 좀 더 내 취향. ㅎㅎㅎ

 

 

 

메종 마르지엘라 매장이 생긴 다음 매번 가서 향을 맡아보곤 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역시 파이어 플레이스가 좋다는 것과, 레이지 선데이 모닝이 의외로 괜찮다는 것. 레이지 선데이 모닝 같은 경우, 예전에는 그냥 꽃 냄새 좀 섞인 비누냄새라고 생각했는데 몇번 더 오며가며 맡아보니 깔끔하게 딱 떨어지면서도 뭔가 파우더리한 냄새가 났다. 아무튼 주머니에 시향지를 넣고 다니다가 갑자기 훅 맡았을 때 어? 이거 괜찮다? 라는 생각이 드는 향수여서 오며 가며 몇번 더 맡아본다. 

오늘 소개할 향수는 2019년 신상인 '스프링 타임 인 더 파크.' 굳이 번역하자면 '공원에서의 봄날'인데, 2019년 상하이라고 써 있는 걸 보면 상하이에 있는 공원을 봄에 걷다가 맡은 꽃냄새 과일냄새인가 보다. 신상이라 그런지 노트 정보를 찾기도 쉽지 않았는데, 탑노트는 백합과 자스민, 다마스크 로즈, 미들노트는 머스크, 우드, 그리고 잔향은 바닐라라고 한다. 노트 정보와 관계없이 내 시향기를 남겨보자면 일단 계열은 퍼지네이블 계열로 분류하고 싶다. 첫향은 부드러운 복숭아 냄새 같은 과일냄새에 웬지 모르게 약간 소금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바닐라인자 우유인지 부드러운 냄새가 같이 났다. 퍼지네이블처럼 파우더리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우유 섞인 복숭아 냄새 같은 느낌은 비슷했다. 미들에서는 확실히 머스크가 섞이면서 서양배 냄새같은 것도 나고 뭔가 시원한 냄새가 나다가 잔향은 바닐라로 마무리 된다. 그런데 바닐라가 그렇게 달거나 강하지는 않고 그냥 탑노트에서 나던 부들부들한 우유냄새 같은 게 그냥 남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약간 쿰쿰한 꽃냄새. 레플리카 플라워마켓에서 맡았던 것 같은 꽃냄새가 남는다. 전반적으로 가볍고 달달하다. 남녀 공용이라고 써 있지만 확실히 여자들이 많이 뿌리고 다닐 향이고, 퍼지 네이블이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향수라고 하니 남자들이 좋아할 향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내 취향에는 역시 너무 여성스럽다. 나는 파이어 플레이스가 역시 좋아. 

 그나저나 오늘의 발견은 그것보다는 레이지 선데이 모닝이라고 해야할 것 같은데, 원래 비누 계열 향수들은 다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해 왔다. 딱히 정감이 가는 향수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웬지 오늘은 칼같이 떨어지는 시원한 느낌과 비누냄새 꽃냄새가 좋았던 것 같다. 오늘 만난 친구가 비누냄새를 좋아하는 애라서 레이지 선데이 모닝 시향지를 갖다주면서 '네가 좋아하는 향이지'라고 했더니 친구는 자기가 평소에 생각하는 내 냄새가 이것과 비슷하단다. 읭? 나한테서 이렇게 깨끗한 냄새가 날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아니... 넌 예전에 나한테 아기냄새 같은 게 난다면서. 라고 했더니 아기 냄새 같으면서도 파우더리 하고 꽃 냄새 같기도 하고 그런 향이란다. 뭔가 아기냄새랑 비누냄새는 너무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고 한편 코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냥 말을 막 지어내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은 자랑으로 마무으리. ㅋㅋㅋ

덧: 친구에게 '내가 좋아하는 건 이건데' 라고 하면서 파이어 플레이스를 맡게 해 보았더니 친구가 으엑! 하면서 말했다. 이건 진짜 아니다. 역시 호불호가 갈리는 파이어 플레이스. ㅋㅋㅋㅋ

 

나는 어떻게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에 반하게 되었나 

세포라가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궁금했다. 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향수도 같이 들어오게 될까?예전 향탐기록에도 잘 나오지만 나는 사실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에 오래전부터 꽂혀 있다. 나도 내가 왜 그런 군밤의 냄새(?)에 꽂혔는지는 모르겠다. 첫 시향기에도 그렇게 써 있다. 향은 참 좋지만 자기 몸에서 불타는 장작 냄새가 나길 바라는 사람의 심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는 없다고. 

예전 레플리카 시향기

2018/03/29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11) 특정 순간을 재현하는 레플리카 향수 (2) - 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레이지 선데이 모닝, 바이 더 파이어플레이스

2018/03/19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10) 특정 순간을 재현하는 레플리카 향수 - 마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재즈클럽, 레플리카 플라워 마켓

그렇게 결론을 내렸건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향이 계속 생각나는 게 문제였다. 바이더 파이어 플레이스에는 알 수 없는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만 생각나고 심지어 그 향을 맡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도 세포라에 갈 때마다 쿰쿰거리며 시향을 해 보고 샘플을 받아오기도 했었다. 당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심지어 어느 잠이 안 오는 밤에 파이어 플레이스를 칙칙 공기 중에 뿌리고 잤다. 스스로에게 '여긴 산장이다. 캠프파이어다' 하고 최면을 걸면서. ㅎㅎㅎ 그러다가 훅 잠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 심각하게 파이어 플레이스를 구매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사이즈가 100ml 하나라는 거였다. 게다가 당시 100ml의 가격은 미국 달러로 120불. 차라리 30ml 짜리가 있었다면 미친 척 덜컥 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몸에서 군밤냄새를 내기 위해 120불이나 내고 100ml나 되는 향수를 사겠냐 말이다. 그래서 결국 못 산 채로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에 와서도 자꾸 생각이 난다는 것이었다. 파이어 플레이스의 그 달콤하고 향긋하고 고소하고 알싸한 향기가 자꾸만 생각났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구할 수도 없었다. 검색해 본 결과 압구정에 있는 10꼬르소꼬모에서 레플리카 향수를 판매한다고는 했지만 재즈 클럽이나 레이지 선데이 모닝은 있어도 파이어 플레이스는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해외 직구도 알아보았다. 그러나 무려 15만원을 주고 사야했고 통관이니 뭐니 복잡한 절차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에게 희소템이 되고 만 파이어 플레이스. 내년 3월에 미국에 학회 다녀올 때나 면세점에서 기웃거려 봐야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세포라가 한국에 들어왔다?

세포라가 오픈하던 날 온라인 매장도 열렸다. 사람들이 줄 서서 들어가는 곳에 같이 줄 서긴 싫고 온라인으로 확인을 해 보니 역시 파이어 플레이스가 있었다! 가격은 15만원. 아아 파이어 플레이스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하다니!! 그런데 손가락으로 주문을 누르려고 하는 순간 역시나 마음에 망설임이 생겼다. ... 군밤냄새를 위해 내가 정말 15만원이나 지불하고 100ml나 되는 향수를 살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며칠 더 생각해 보자 하고 화면을 껐는데, 며칠 후 다시 들어가 보니 파이어 플레이스만 품절이었다. 왜!? 왜 파이어 플레이스만?! 재즈클럽도 있고 레이지 선데이 모닝도 있고 대중적인 향수도 많은데 도대체 왜 파이어 플레이스만! 여튼 파이어 플레이스는 그렇게 또 다시 희귀템이 되고 말았다. 나에게 집착과 애증을 남긴 채... ㅎㅎㅎ

그러던 어느날 메종 마르지엘라 매장이 신세계에 들어왔다?

그것도 내가 늘 지나가는 향수골목 한 복판에.  아니 레플리카 향수가 대체 몇개나 된다고 이런 매장을? (사진을 보면 쭉 세워놓은 향수가 몇개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갑작스럽게 레플리카 매장이 생겨버리면서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는 더 이상 희귀템이 아닌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언제든 파이어 플레이스를 시향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가서 오랜만에 맡아보니 역시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0ml 짜리를 사기에는 망설여진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파이어 플레이스와 밀당을 하고 있는 중이다. 

신세계 강남점에 들어온 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매장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향인 것 같다. 같이 매장을 방문한 친구에게 이게 바로 나에게 애증과 집착을 남긴 파이어 플레이스다 라고 말하니 친구는 시향해 보면서 좋은 향이라며 눈을 치켜떴다. 그런데 니가 말한 게 뭔지는 알겠다. 군밤 냄새인데 이런 냄새가 몸에서 나길 바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고. 차라리 방향제로 쓰면 너무 좋을 거 같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한참 후에도 또 얘기를 꺼냈다. 그 파이어 플레이스 정말 좋은 거 같다고. (그렇게 친구도 파이어 플레이스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반면, 엄마와 함께 매장 앞을 지나가다가 엄마 이게 내가 좋아하는 향이야- 하고 손에 뿌렸더니 엄마는 온상을 찌뿌리며 말했다. 이건 정말 아닌 거 같다. 라고. 그러니까 파이어 플레이스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제는 누구나 시향 가능한 메종 마르지엘라 매장에 방문해 보시길 바란다. ㅎㅎㅎ

참고로 시향지가 엄청 귀엽다. 레플리카 향수는 약병처럼 생겨서 그 위에 패브릭으로 라벨이 붙어 있는데, 시향지가 그 라벨 모양이다. 시향지도 귀엽지만 그 위에 향수 정보가 쓰여 있어서 헛갈리지도 않고 참 좋다. 

그러다보니 오며가며 모은 시향지만 이렇게 많아졌다. 어떤 순간을 재현한 것인지 기록이 적혀있다. (내 허벅지는 신경쓰지 말자 ㅎㅎ) 파이어 플레이스 시향지는 핸드폰 케이스에 끼워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신용카드에 베고 있는 중이다. ㅋㅋㅋ 그리고 여태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레플리카의 다른 향수들도 맡아보고 있다. 언더 더 레몬트리라던가, 위스퍼스 인더 라이브러리 라던가, 비치워크라던가. 그러니 시향기를 곧 기대하셈! ㅎ

요즘은 도서관 가는 길 향수골목을 지나며 시향지 하나씩 가져오는 게 낙이다. 오늘은 딥티크에 가서 롬보르단로, 베티베리오, 그리고 탐다오를 시향지에 뿌려 가져왔다. 롬보르단로는 생각보다 꽃향기가 너무 강해서 가방 속에 넣어버렸고 (읭?) 베티베리오탐다오는 손에 들고 킁킁거리며 도서관으로 올라왔다. 딥티크의 향수 중 유명하다는 것들은 다 맡아본 것 같은데, 내게는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도손이나 롬보르단로같은 딥티크의 꽃향기는 좋긴 하지만 내겐 좀 멀미나는 향들이다. 필로시코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곧 질렸고, 탐다오가 제일 맘에 들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리뷰는 탐다오.

노트정보는 다음과 같다.

탑노트: 로즈우드, 사이프러스, 머틀나무. 

미들노트: 샌들우드, 시더우드

베이스노트: 스파이시노트, 앰버, 화이트머스크, 로즈우드.

노트 정보를 보면 알겠지만 주로 나무다. 탐다오는 전반적으로 향긋한 나무냄새다. 이런 냄새를 내가 어디서 맡아봤더라 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에서 노트 정보를 검색하다보니 절냄새란다. 절냄새라고 하니 뭔지 알 거 같고 확실히 절냄새 같은 면도 있어서 빵터지긴 했지만, 절냄새라고 격하하기에는 그래도 좀더 향긋하고 스파이시 하다.

오래된 나무 건물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들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한 선배 둘과 안동 병산서원에 답사를 갔다가 바람 솔솔 불어오던 만대루에서 살짝 잠이 들었는데 그때 바람결에 실려오던 향긋한 나무냄새 같은 것. 사람 손이 많이 닿아 그 온기가 스며 반들반들한 나무 마룻바닥에서 나던 그런 편안하고 시원한 나무 냄새. 거기에 알싸하고 스파이시한 향 냄새가 추가 되니까... 결국 절냄새가 되네...ㅋㅋㅋ 그래 인정하자. 탐다오는 절 냄새다. 절냄새보다 조금 더 스파이시하고 향긋하지만 절 냄새다. 그런데 그래도 좋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나무냄새니까.

....그런데 역시 남자향수라 한다. ㅎㅎㅎ

딥티크 탐다오

베티베리오는 나무냄새이긴 하지만 꽃냄새가 더 많이 가미된 느낌이다. 꽃향기 때문에 우디하면서도 탐다오보다는 여성스러운 향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왜 그런지 탐다오만큼 시원하지는 않고 게다가 중간에 짭짤한 냄새같은 게 난다. 그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다. 클로브인가? 왜 블루바틀 커피 마실 때 치커리 향같은 그런 짭짤함. 아무튼 짠 꽃나무 향기 정도 되겠다. 내 취향은 아닌듯 하다. 

탑노트: 베르가못, 그레이프 푸르투, 레몬, 만다린 오렌지.

미들노트: 제라늄, 로즈, 넛맥, 클로브

베이스노트: 베티버, 머스크, 시더우드

 

요즘은 새로운 향수들을 이거저거 시향해 보고 있지만 그래도 한바퀴 빙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듯 항상 조말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조말론의 향들은 다른 향수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화장품 냄새 같은 인공적인 향기가 덜 하고, 프루티 플라워 계열도 그렇게 심하게 달거나 독하지 않아서다. 

오랫동안 조말론의 향수를 시향하면서 이제 조말론의 거의 모든 향수들을 맡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 '싸한' 향이 나는 향수들은 정말 너어어어어어무 좋다. 여타 브랜드의 향수들이 흉내낼 수 없을만큼 좋다. 대표적인게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의 페어향, 그리고 블랙베리 앤 베이의 월계수 향 같은 것들이다. 조말론의 '알싸한' 그 향들은 시원하면서도 중성적이어서 꽃이건 과일이건 너무 달지 않게 향을 잡아준다. (2) 가끔 예상을 깨며 '톡 쏘는' 향들을 만들어낸다. 장미향이나 바질향이라면 대부분은 뭉게뭉게 부드러우면서 훅 치고 들어오는 향이기 마련인데, 조말론의 바질향이나 장미향 같은 건 '톡 쏘는'향이라서 시고 강렬하다. 내 취향에는 그저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대표적인게 라임 바질 앤 만다린, 그리고 레드 로지즈, 벨벳 로즈 앤 오우드 같은 것들. (3) 물 계열의 향들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 같지만 나한테는 멀미가 심하게 나서 아예 시향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대표적인 것들이 와일드 블루벨, 피오니 앤 블러시 스웨이드. (4) 마지막으로 우디하고 시원한 향들이 있는데 그 향들은 남들이 자꾸 남자향수 같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나한테는 너무 매력적이다. 대표적인 게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 넛, 잉글리시 오크 앤 레드커런트. 그리고 오늘 리뷰할 오우드 앤 베르가못이다. (조말론 웹사이트에는 헤이즐넛은 스파이시로, 레드커런트는 프루티로 분류가 되어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두 향수 다 잉글리시 오크 향이 제일 세다. -_-) 

조 말론의 향수들 중 까만 병에 담겨있는 향수들을 '인텐스' 콜롱이라고 한다. 이 계열의 향수들은 전반적으로 우디하고 매캐하다. 오우드 앤 베르가못은 역시 우디하고 매캐한 맛이 있으면서도 첫향부터 끝향까지 아주 시원하고 깔끔한 향이 난다. 첫향에서는 살짝 버가못의 상큼하고 달달한 향이 난다. 버가못 답게 그렇게 시거나 심하게 달지 않고 대신 달달하고 시원한 느낌이다. 시더우드는 노트 정보에는 미들노트부터 나는 걸로 되어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전반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디한 향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우디하면 살짝 건조한 느낌이 들기 쉽지만 그럼에도 버가못 때문인지 그렇게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미들노트부터 어디서 맡아본 거 같은 향긋한 냄새가 낮게 깔리기 시작하고 뒤로 갈 수록 더 진해진다. 오우드가 뭔지 모르겠어서 이게 오우드인가 싶었는데... 이걸 어디서 맡아 봤더라... 하고 생각해보니, 서예할 때 먹물에서 나던 냄새랑 비슷하다. 도서관에서 시향지 옆에 놓고 글 쓰고 있었는데 누가 옆에서 붓글씨 쓰는 줄. ㅎㅎㅎ 이렇게 써 놓으면 의잉? 어찌 그런 향이 몸에서 나길 바란단 말이오?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 선비의 향기라고 할까? ㅋㅋㅋㅋ 그보다는 나무 향이 강하고 향긋한데 버가못 때문에 세련미가 더해져서, 선비는 선비라도 센스있고 세련된 선비라고 해야할까. (대체 뭐라는 거야ㅋㅋㅋ). 어쨌건 중요한 건 코가 즐겁다는 것이다. 다른 시향지랑 비교해서 맡아봐도 역시 오우드 앤 버가못 시향지를 맡을 때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음에 든다. 

탑노트 : 베르가못

미들노트: 시더우드

베이스노트: 오우드 

다만... 아무리 맡아도 남자 향수라는 게 문제다. 잉글리시 오크 시리즈 정도로 남자 스킨 냄새 같은 건 아니지만, 당장 오우드 앤 베르가못으로 검색만 해도 '남자 향수 추천'이라는 사이트들이 제일 위에 뜬다. 아니 대체 왜 내가 좋아하는 향수들은 다 남자 향인거야. 잉글리시 오크 시리즈도 나는 여전히 너무 좋은데 언니는 남자향수라고 뿌리지 말라고 한다. 내가 '커피집 직원이 좋다고 뭐 뿌렸냐고 물어봤어' 라고 했더니 언니는 말했다. '자기가 뿌리고 싶어서 물어봤나 보지~!!' ㅋㅋㅋㅋ 

어쨌거나 훅 치고 들어오는 꽃냄새나 과도하게 상큼달달한 과일 계열 향수들은 내게 종종 곤혹스럽다. 물 냄새가 섞여있는 꽃 냄새들은 독하지는 않지만 멀미가 난다. 그리고 나는 자꾸 시원하고 알싸한 향에 끌린다. 그리고 나무냄새가 좋다. 그러다보니 자꾸 남자향수를 좋다고 하나 보다. 여성스러운 향인데도 내가 반했던 향은 딱 크리드 어벤투스 포 허 하나인데 그건 인간적으로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다. =_=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래도 내 코가 즐거운 대로 남자 향수를 뿌리고 다니려 한다. 기다리시오, 오우드 앤 버가못. 내가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저축하여 곧 그대를 맞으러 가리다. 그런데 그대도 꽤 비싸오. 인텐스 계열 콜롱들은 대체 왜 그렇게 비싸오. 솔직히 지속력도 별로잖소. 물론 나 같은 향탐생들에게야 지속력 짧은게 또 매력이긴 하오만. 

덧1:

오우드 앤 버가못은 뭐랑 레이어링 하면 좋아요? 라고 매장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매장 직원이 '조말론의 모든 향이랑 다 잘 맞아요'라는 정말 무성의한 답변을 해 주었다. 조말론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니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이랑 잘 어울린다고 하던데. 나는 두 향을 다 좋아하니 그렇게 레이어링 해 볼 용의는 있다.... 다만 남자향수 + 남자향수가 여자향수가 될리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만.  

덧2:

언니가 좋아한다는 다크 앰버 앤 진저릴리도 시향지를 가져와 다시 시향해 보았다. 매캐하면서도 어딘가 우드 세이지 앤 씨솔트 같은 부드러운 향과 함께 꽃향기 같은 것도 풀풀 난다. 그런데 약간 짠내가 난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꽃향기 같은 것 때문에 인텐스 계열이라도 이건 좀 여성향수 같은데 말이지. =_=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나온 오늘은 어쩐지 여성스러운 향수를 뿌리고 싶어서 향수골목을 지나며 뿌려본 향수는 딥티크 필로시코스. 딥티크에서도 제일 유명한 향수들 중에 하나다. 송혜교가 뿌려서 유명해졌다는 듯. 

 

공용향수라고 하긴 하지만 아무리 맡아도 여성스러운 과일 향수다. 과일 향수라고는 해도 흔히 맡을 수 있는 과일 향수들처럼 막 상큼달콤하지는 않다. 무화과도 맛이 자극적이지 않은 과일이지만 (적당히 달달하다, 신 맛은 없다) 향수 역시 적당히 달달한 향이다. 그런데 첫 향에서는 무화과를 따서 콱 뭉갰을 때 날 법한 생 무화과의 향이 센 편이다. 아주 날 것의 풀 냄새가 나서 싱싱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탑노트에서도 코코넛 냄새가 나지만 미들노트부터는 더 코코넛 냄새가 강하게 난다. 하지만 무화과 냄새 + 코코넛 냄새라고 하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달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텁텁하다. 우드 세이지 앤 씨 쏠트의 텁텁함과 비슷한데 좋게 말하면 부드럽지만 어쩐지 답답한 냄새이기도 해서 쨍하고 시원하고 화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별로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텁텁함 때문에 여름보다는 겨울에 더 어울릴 것 같은 향수다. 개인적으로는 탑노트를 맡으면서는 그 싱싱함이 좋아서 아 신선하다 고급진 냄새다 하고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조금 지겨워졌고 그게 지나면서도 계속 텁텁한 냄새가 나니 좀 괴로웠다. 되려 다른 손목에 뿌렸던 어벤투스 포 허가 아무리 봐도 더 내 취향인 듯. 가성비를 생각하면 나한테는 사서 뿌릴 향수는 아닌 듯 하다. 

노트정보는 아래와 같다. 

탑 노트: 무화과잎, 무화과

미들 노트: 코코넛, 그린노트

베이스 노트: 시더우드, 우디노트, 무화과 나무

 

지하철 역에서 내려 도서관 가는 길에 신세계 면세점을 통과하는데 언제나 여러 향수브랜드 부스가 즐비한 향수골목을 지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눈길만 흘깃 줘도 후다닥 앞으로 나와 뭘 찾으시냐 묻는 직원이 부담스러워서 어버버 하다가 도망가곤 했지만 어느새 나도 서울시민으로 정착한지 세달쯤 되지 않았나. 그러니까 뻔뻔하게 이거 저거 시향해 볼 수 있을까요? 하면서 사지도 않을 향수를 맡아보고 뿌려본다. 예전에 아마존 등으로 미니어쳐를 구해서 향수를 맡던 시절에 비하면 참 얼마나 향수시향이라는 취미생활에 도움이 되는 환경인가. ㅎㅎ 여튼 한참을 크리드 시향에 빠져 있다가 크리드 직원 언니가 내 얼굴을 알아볼 때쯤 된 거 같아서 요즘 살짝 발길을 돌린 곳이 바이레도 부스. 요즘에는 유명하다는 블랑쉬와 라튤립, 집시워터, 모하비 고스트, 블랙 사프론 등을 맡아보았다. 그 중에서 오늘 쓰려는 향수는 발다프리크

발다프리크를 시향한 이유는 어느 웹사이트에선가 발다프리크가 메종 마르지엘라의 바이 더 파이어플레이스와 비슷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이상하게 파이어 플레이스에 꽂혀 있는데, 그게 그렇게 중독성 있는 향이었나 자꾸 맡아보고 싶고 생각나고 그런다. 그런데 한국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미국에서 사왔어야 해- 하고 울며 땅을 치는 아이템이다. 아무튼 아쉬운 마음에 자꾸 파이어 플레이스를 검색해 보는데 비슷한 향으로 바이레도 발다프리크가 종종 언급되길래 궁금해져서 오늘은 반드시 바이레도 부스에서 발다프리크를 시향해 보리라 하는 기대감을 안고 발다프리크 시향지를 들고 도서관에 왔다.

그런데 응..? 향이 전혀 다르다? 파이어 플레이스는 장작에 군밤타는 냄새 비슷한데 일단 여성 향수는 확실히 아니고 심지어 남성 향수라기에도 너무 탄내라서 그냥 군밤의 향수다. ㅋㅋㅋㅋ  그런데 바이레도는 탑노트는 딱 향긋한 여성향수 느낌이다. 버가못과 레몬이 탑노트에 들어가 있는데 오히려 내 코에는 좀 고급진 데메테르 퍼지 네이블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복숭아와 크림 맛이 반씩 섞인 추파춥스 같은 향 혹은 휘핑크림을 얹은 피치코블러 같은 향이라고 생각했다. 미들노트에서는 시트러스 향이 훅 사라지면서 달달하고 향긋한 바닐라 같은 냄새가 남는다. 잔향에서는 바닐라가 잦아들면서 서서히 나무냄새로 바뀐다. 

노트정보는 다음과 같다. 

탑 노트 ㅣ 아프리칸 메리골드, 베르가못, 레몬, 네롤리, 천수국부쿠

미들 노트 ㅣ 시클라멘, 재스민, 바이올렛

베이스 노트 ㅣ 블랙앰버, 모로칸 시더우드, 머스크, 베티버

아무튼 나에게 발다프리크의 전반적인 인상은 퍼지 네이블 게열이라는 거다. 물론 단일노트인 퍼지네이블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급진 향이지만 계열이 그렇다는 거다. 예전에 무슨 뷰티 프로그램에선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향수로 퍼지네이블을 꼽았다고 하는데 향이 달달하고 부드러워서 청순하기도 하고 아기향수 느낌도 나고 그래서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발다프리크도 내게는 비슷한 느낌이다. 튀지 않게 상큼하고 부드럽고 달다. 좋은 향수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군밤 향수를 그리워했던 나는 못내 아쉬웠다. 

바이레도만 시향하기 아쉬워서 모하비 고스트도 시향지를 들고 왔다. ㅎㅎㅎ 모하비 고스트의 탑노트에서는 꽃냄새와 함께 물냄새가 났다. 나는 물비린내에 취약해서 물과 관련된 향수는 거의 무조건 멀미를 한다고 보면 되는데, 그래도 여타 물 관련 향수들에 비해 물 비린내가 심한 편은 아니었다. 레플리카의 플라워 마켓에서 나는 물냄새 비슷하게 꽃잎에 맺혀있는 싱싱한 물방울 느낌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역시 물 냄새는 내 취향은 아닌 듯. 아니 모하비 고스트라며. 모하비는 사막인데 왜 물냄새가...) 코를 대고 맡으면 좀 괴롭지만 팔락팔락 시향지를 흔들어 보면 매우 좋은 냄새가 났다. 그래도 탑노트는 꽤 은은한데 미들노트에서는 훅 하고 각종 꽃냄새가 치고 올라온다. (각종 꽃냄새라니 정말 무성의한 표현력이군 ㅎㅎㅎ) 내 코에는 장미 같은데 노트 정보에 따르면 목련이라고 하니 목련인걸로. ㅎㅎㅎ 노트 정보는 아래와 같다. 

탑 노트 ㅣ 암브레트, 네스베리

미들 노트 ㅣ 매그놀리아, 샌달우드, 바이올렛

베이스 노트 ㅣ 시더우드, 머스크, 앰버

 

"향수 뭐 뿌리셨어요?" 

커피집 직원이 물었다. 조 말론 블랙베리 앤 베이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을 레이어링해서 뿌린 날이었다. 이렇게 긴 이름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읊어주고 나니 본인이 향수에 관심이 많노라며 우디한 향을 좋아한다고 했다.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향을 좋아하지만 남자 스킨냄새 같은 면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는데 칭찬을 받으니 갑자기 잉오헤에 대한 자신감이 한껏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분이 말했다. 

"저는 톰포드를 좋아해요."

톰포드라. 니치 향수에 대해 조사할 때 한쪽 귀로 자주 들었던 이름이긴 한데, 조말론에 꽂히는 바람에 다른 쪽 귀로 날아가버린 그런 향수 브랜드였다. 톰포드에도 잉글리시 오크 같은 향수가 있으려나 싶어서 물어봤다.

"톰포드는 뭐가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건 패뷸러스요."

그러나 귀가 어두운 나는 또 잘못 알아듣고...

"히글러스요?" (내가 말해놓고도 어쩐지 굉장히 흉악한 향이 날 것 같은 향수 이름이었다. ㅎㅎㅎ) 

여튼, 그래서 도서관에 오는 길 신세계 면세점들을 지나가다가 톰포드에 가서 한번 맡아본, 톰포드 XX 패뷸러스.

톰포드 패뷸러스는 사실 차마 부르지 못할 이름을 가지고 있는 향수였다. 마치 디자인인 것처럼 빨간 줄로 그어진 저 부분에는 사실....

원래 이름인 욕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ㅋㅋㅋㅋ 아니 향수 이름에 F-word 를 넣으면 어떻게 부르란 말이냐. 그래서 70년대도 아닌데 한국에 들어올 때 검열을 거쳐 F단어 에 빨간 줄을 그어 들어온, 톰포드의 패뷸러스 (영어이름은 퍼킹 패뷸러스, 직역하면 '겁나 멋짐' 정도 되겠다).

그래서 어땠냐고? 음. 예상 밖의 냄새가 났다. 일단 조말론의 잉글리시 오크와는 아예 계열이 다르다. 베이스 노트에 화이트 우드가 들어가 있긴 하고 매캐한 향이 나기는 하지만 오히려 조말론으로 치면 Myrr and Tonka 라던가 하는 인텐스 계열 향과 비슷한 느낌이다. 매캐하고 살짝 달달한 바닐라 향이 난다는 점에서는 다크앰버 앤 진저릴리와 비슷하지만 거기에 가죽냄새와 약간의 쇠냄새(?)도 섞인 듯 해서 좀 더 남성적으로 느껴진다. 웬지 아랍 향신료같은 인상은 비슷하다. ㅎㅎㅎ 흔히들 관능적인 향이라고 한다는데 '관능적인 향'이라는 게 뭔지 나는 아직도 당췌 모르겠다. 확실히 화려하고 강렬한 향인 건 알겠다. 하긴 다크앰버 앤 진저릴리도 처음에 맡았을 때는 '읭' 했지만 지날 수록 조금 중독성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으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향수 역시 더 맡다보면 좋아하게 될 수도. 

아래는 노트 정보다. 

탑노트: 라벤더, 세이지

미들노트: 가죽, 바닐라, 비터 아몬드

베이스 노트: 통카 빈, 앰버, 레더, 캐시미어, 화이트 우드. 

 

덧:

왼쪽 손목에는 톰포드의 패뷸러스를, 오른쪽 손목에는 크리드 어벤투스 포 허를 뿌리고 도서관에 왔다. 뿌리자 마자 코를 댔더니 예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상큼한 과일향이 안 느껴지길래... 너무 예전에 과대평가를 했었나? 하고 생각하며 왔는데... 일하다보니 정말 아름다운 미들노트가 훅 치고 올라온다. 이건 사과향이랄지 꽃향이랄지. 은은하고 여성스러운 듯 하면서도 발랄한 그 느낌. 아.. 어벤투스 포 허... 네가 진짜 15만원만 더 쌌어도... (너무 깎았나? ㅎㅎㅎ) 언젠가는 꼭 사고말테다, 치토스. 

덧 2:

양 손목에 두개의 다른 향수를 뿌렸으니 차마 어디에 더 뿌리지는 못하고... 조말론에 갔다가 신상인 파피 앤 발리를 시향지에 뿌려 들고 왔다.  파피 앤 발리는, 예전에 한정판으로 나온 '잉글리시 필드' 시리즈 중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던 향을 온고잉 상품으로 만든 거라고 한다. 잉글리시 필드 시리즈는 한번도 못 맡아보다가, 얼마전 친구가 들고 다니던 그린 어쩌구 (...향수 블로그에서 이게 쓸 표현인가) 가 참 좋았던 기억이 나서 파피 앤 발리도 한번 맡아봤는데... 곡식 냄새 많이 나고 약간은 쿰쿰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조 말론은 참 자연적이어서 좋단 말야. 조 말론 매장에 간 김에 요즘 살짝 눈길을 주고 있던 오우드 앤 버가못도 시향지에 뿌려서 들고 왔는데, 역시 좋다. 다음에는 오우드 앤 버가못 손목에 뿌려봐야지. ㅎㅎ

이사 오고 나니 내 동선에 신세계가 있어서 향수탐방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ㅎㅎㅎ 

크리드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몇년전부터 나의 최애가 은지원이기 때문이다. ㅎㅎㅎ 최애가 쓰는 향수가 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은지원 향수를 검색해 보니 크리드 밀레지움 임페리얼이라고 해서 그게 대체 어떤 향인지 맡아나 보자고 생각하던 어느날. 백화점 면세점에 크리드가 있길래 가서 한번 뿌려 보았다. 첫 향은 으윽- 남자 향수다. 화장품 향 좀 강한데? 였다. 글쿠나, 이런 향수구나. 하면서 일하러 도서관에(?) 갔는데... 한참 일하다 보니... 어? 미들노트가 되게 좋다? 언제 치고 올라온 건지 달달하고 향긋한 과즙냄새가 짭짤한 소금냄새에 섞여서 났다. 허브냄새같은 쌉싸름한 향이 감도는 은은한 꽃향기 (이게 아이리스일까)와 함께 너무 달지 않은 과일향이 난다.  전반적으로는 아주 부드러운데 그 모든 냄새들이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향이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없이 킁킁 거리다 보니 베이스 노트로 바뀌었는데 약간 짭짤한 소금 냄새와 함께 부드러운 잔향이 남았고, 잔향은 굉장히 은은하고 부드럽게 나다가 어느 순간 쓱 사라진다. 뭐지? ㅎㅎ 살짝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향수. 굳이 비교하자면 전반적으로 약간 조말론 우드 세이지 앤 씨 쏠트랑 비슷한 느낌인데, 은은한 과즙향과 약간 짭짜름한 씨쏠트의 조합이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밀레지움 임페리얼은 우드 세이지 앤 씨 쏠트보다 덜 건조하고 미들노트의 과즙향에 꽃향기가 섞여 있어서 훨씬 더 향긋한 느낌이 든다. 첫향은 남자 향수 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미들노트와 베이스 노트의 부드러움과 향긋함 때문에 중성적인 느낌이 드는 매력적인 향수였다. 그래서 그 뒤로도 몇번 더 지나가면서 손목에 뿌려 보았다. (죄송합니다. 직원분... 사지도 않을 걸 자꾸 뿌려서 ㅎㅎ) 그런데 뿌리면 뿌릴 수록 끌리는 향수였다.  은지원... 좋은 향수 뿌리는 구나. 

크리드 밀레지움 임페리얼

탑 노트 :버가못, 과일 노트, 씨솔트

미들 노트 : 아이리스, 레몬, 만다린 오렌지

베이스 노트 : 머스크, 앰버, 우디노트, 씨노트

노트 정보는 다음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첫 향에서 과일 노트나 소금기는 별로 강하지 않다고 느꼈다. 오히려 미들노트에서 만다린 오렌지인지 과일 냄새 꽃냄새가 참 좋았다. 잔향에서도 머스크나 앰버는 별로 강하지 않고 바다노트와 우디 노트가 강한 듯 하다. 

밀레지움 임페리얼을 호시탐탐 눈독들이며 뿌리다 보니 옆에 있던 다른 향수에도 눈이 갔다. 그 향수의 이름은 크리드 어벤투스 포 허. 원래 어벤투스는 남자 향수로 알고 있었는데 여자용으로 나온 게 어벤투스 포 허인가 보다. 

크리드 어벤투스 포 허

탑노트: 패츌리, 청사과, 레몬, 버가못, 핑크페퍼, 바이올렛

미들 노트: 장미, 샌달우드, 머스크

베이스: 복숭아, 블랙커런트, 라일락, 앰버

어벤투스는 첫 향에서 훅 하고 과즙향과 꽃향기가 풍겨온다. 사과향과 버가못향이 강해서 상큼하고 달달한 느낌이 들지만 그렇게 심하게 달지는 않고, 이런저런 꽃냄새가 섞여서 다채로운 향이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깔끔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상큼함 때문인지 밝으면서도 은은하게 풍겨와서 우아한 향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루티플로럴 계열은 가끔 꽃냄새의 잔향이 숨막히거나 과일향이 지나치게 달거나 할 때가 있는데, 어벤투스는 인공적인 냄새가 거의 없고 꽃이랑 과일향이 잘 조화되어 있다. 여튼 최근 맡아본 플로럴프루티계열의 향수 중에서는 단연 최고로 세련된 향인 듯. 그런데 이 향수의 문제점은 베이스 노트가 평범하다는 것이다. 잔향을 주도하는 건 머스크였는데, 탑노트나 미들노트에 비해서 딱히 고급지지가 않았다. 페이스샵에서 맡을 수 있는 화이트머스크랑 비슷하기도. 사실 머스크향에 멀미를 일으키는 나로서는 조금 그 잔향이 아쉽다. 하지만 탑노트와 미들노트만큼은 정말 너무 매력적인 향수였다. 

이렇게 매력적인 향수들이지만 인간적으로 가격이 너무 비싸다. 아니 저 사진에 있는 어벤투스 포 허 사이즈가 글쎄 240불이고 한화로는 29만원이라고 한다. 아니 저런 코딱지만한 병에 있는 향수를 어떻게 30만원씩이나 주고 산단 말인가. ....은지원... 돈이 많았구나... ㅜ_ㅠ 하긴 사람마다 다 돈을 쓰는 분야가 다른 거니까. 나는 같은 돈을 내고 노이즈캔슬링 헤드셋이나 빔 프로젝터를 살 수는 있지만 그만한 돈을 내고 향수를 살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서관 가는 길에 크리드 매장을 기웃거리며 손목에 뿌려보고 킁킁거리면서 일하는 정도다. ㅎㅎㅎ 

 

 

 

 

 

 

 

얼마전 한국에 귀국했다. 그리고 적어도 사계절은 한국에서 나게 되었다. 그런데 여름에는 몰랐는데 가을이 되자 슬슬 날씨가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이제 정말 가을이 되는구나. 계절 변화가 별로 없던 곳에서 오래 살다가 사계절이 있는 도시에 와서 그런지 어쩐지 설렘설렘하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이제 예전처럼 날씨 상관없이 향수를 뿌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전에 불가리 쁘띠 에 마망과 데메테르 퍼지 네이블을 뿌리고 걸으러 나갔다가 헉... 이건 절대 습한 날씨의 여름에는 뿌리면 안되는 향수였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하지만 그 말인즉슨 이제 계절별로 어울리는 향수를 뿌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계절에 어울리는 향수라니! 꺄하! 

그러므로 오늘은 향탐기록이 아닌 향탐특집. 사계절에 어울리는 향수를 (소장향수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향수들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차적으로는 날 위한 거지만 2차적으로는 이 블로그를 읽으시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1. 가을향수.

일단 날씨가 선선해지고 있으니 가을향수부터 정리해보자. 일단 가을에 제일 잘 어울리는 향수는 조말론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조말론 잉글리시 오크 앤 레드커런트다. 둘 다 나무 냄새를 베이스로 하고 있어서 가을의 숲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향수이기 때문이다.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은 가을의 숲을 걷다가 헤이즐넛 열매를 밟았을 때 날 법한 파삭한 냄새가 난다. 레드커런트는 같은 숲을 걷다가 레드커런트 열매를 따서 콱 깨물었을 때 날법한 냄새가 난다. 이렇게 가을스럽고 아름다운 향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레드커런트는 좀 더 여성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나무냄새가 강해서 남자 향수스럽다. ㅎㅎㅎ 그러므로 이를 보완하는 대책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레이어링! ㅎㅎ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은 이 두 향수에 블랙베리 앤 베이를 더하는 것이다. 블랙베리 앤 베이도 사실은 중성적인 향수다. 싸하게 느껴지는 월계수 향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즙향이 제일 풍성하게 풍겨오는 향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을스럽고 건조한 잉글리시 오크 시리즈랑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레드커런트와 레이어링 했을 때는 과즙향이 더 강해지지만, 역시 나는 헤이즐넛의 그 크리스프한 향이 더 좋다. 

2. 여름향수.

왜 계절별로 안 가고 여름 향수부터 얘기하느냐면.. ㅎㅎㅎ 아직도 날씨가 덜 선선하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공기가 선선해서 가을향수를 뿌리고 갔지만 낮에는 여전히 더워서 땀을 흘리면서 일했다. 여름 향수는 일단 절대 텁텁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베이비파우더 계열은 무조건 멀리해야 한다. 대신 시트러스 향을 가지고 있는 가벼운 향수들이 아마 시원하고 상큼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여기에 소개한 소장향수 중에서 제일 여름스러운 향수는 불가리 오 떼 베르. 은은한 차 향기와 너무 방방 뜨지 않는 시트러스 향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또 다른 하나는 프레쉬 브라운 슈가. 사실 프레쉬는 화장품 향이 덜 해서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 지나치게 가볍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기 때문에 여름 외의 계절에 뿌리기엔 적합치 않게 느껴지는 향수이기도 하다. 얼마전 브라운 슈가를 뿌리고 일하러 갔는데 킁킁 냄새를 맡으며 어쩐지 익숙한 이 향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더라... 하고 생각해 보다보니... 약간 아이셔 사탕 냄새 ㅋㅋㅋㅋ 아무튼 달달하고 상콤한 이 향수는 여름에 가볍게 뿌리기에 딱이다. ㅎㅎ 모스키노 아이러브러브도 역시 같은 여름 향수 계열. 여름 향수들이야 무궁무진하게 많다. 

3. 겨울향수

겨울 향수는 날씨가 건조하고 추울테니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향수가 좋을 것 같다. 베이비파우더 계열의 향수들이 아마 좋을 것 같다. 겨울이 오면 뿌리려고 벼르고 있는 향수는 역시 불가리 쁘띠 에 마망. 달달하면서도 파우더리하고 그러면서 살짝 우유냄새도 나는 쁘띠 에 마망은 이번 겨울 중에 앞자리가 바뀌는 나이에는 조금 적합치 않을 수도 있다. ㅎㅎ 하지만 뭐 어때! ㅎㅎㅎ 여름에 자주 뿌리지 못한 이 향수를 겨울에 뿌리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ㅎㅎㅎ 그 외에도 다른 베이비 파우더 향수들 하라주쿠 러버스 베이비, 데메테르 베이비 파우더데메테르 퍼지 네이블 등도 아마 겨울에 뿌리면 좋을 것 같다. 그 외에도 또 생각나는 건 역시 달달함의 끝을 보이는 입생로랑 파리지엔느. ㅎㅎㅎ 두꺼운 캐러멜 냄새가 나는 이 향수도 여름보다는 겨울에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ㅎㅎㅎ 

4. 봄 향수

마지막으로 남은 봄향수. 봄은 사실 어느 향도 다 잘 어울리겠지만 봄의 설렘설렘한 느낌에 걸맞는 건 아무래도 꽃향기 풀향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봄에 뿌릴만한 싶은 향수는 랑방 에끌라 드 아르페쥬 등의 복숭아 아이스티같은 향, 아니면 마크 제이콥스 데이지나 끌로에 시리즈 등 꽃향기가 나는 향수들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조 말론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도 봄 향수로 분류하고 싶다. 잉글리시 페어의 시원함 때문에 여름에도 뿌리기 좋지만 짙게 남아있는 프리지아 잔향 때문에 어쩐지 꽃향기의 인상이 강한 향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사계절 뿌리게 되겠지만. ㅎㅎㅎ

겔랑에서 향수 샘플을 받았다. 겔랑이 화장품보다 향수로 먼저 시작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딱히 겔랑 향수는 맡아본 적도 별로 없고 관심도 별로 없었는데, 별 생각 없이 손목에 뿌렸다가 엇? 이거 좋은데?! 하는 느낌에 간만에 (진짜 간만에) 리뷰 시작. 

일단 향수 설명이 꽤 귀엽다. 향수 설명이 무려 "강기슭 잔디 위에서의 점심식사 (Luncheon on the grass on a riverbank). 톡 쏘는 과일을 꽉 깨물면서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biting into a tangy fruit. Listening to a birdsong)."고 되어 있다. 점심 식사가 오렌지였나 보다. 이런 설명을 보고 있으려면 웬지 순간을 담는다는 레플리카가 생각날 듯도 하다. 여튼 강기슭 잔디의 피크닉처럼 가볍고 즐거운 향수를 만들기로 작정한 것 같은 향이 난다. 이런 걸 보면 향수에 스토리를 담거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게 향수를 차별화하는데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탑노트는 만다린 오렌지를 꽉 깨물면 날 법한 향이다. 물기가 많이 포함된 싱그러운 오렌지 향이랄까. 미들노트부터는 오렌지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바질향이 올라온다. 남들도 그런가 모르겠는데 바질향은 나한테는 항상 비누냄새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랑방잔느의 비누냄새랑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같은 바질과 만다린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조말론의 라임, 바질 앤 만다린 (일명 라바만)과는 아예 향이 다르다. 조말론의 라바만은 처음부터 톡 쏘는 향이 강하고 시트러스와 바질 냄새가 동시에 난다면, 겔랑은 처음에는 오렌지향이 강해 바질이 느껴지지 않다가 미들노트부터는 오렌지가 아주 연하게 깔린 상태에서 바질향이 전체적으로 강하게 나고 전반적으로 굉장히 부드럽다. 베이스는 바질향이 사라지면서,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아주 무겁지는 않은 나무냄새가 난다. 은은하게 앰버향도 나서 향긋하다. 지속력은 약한 편인듯 하고, 탑-미들-베이스 노트로의 진행도 빠른 편인 것 같다. 

노트정보는 다음과 같다. 

탑노트 : 오렌지 블라썸, 비터 오렌지, 아이비, 그린트

미들노트: 카모마일, 만다린 오렌지, 바질

베이스 노트: 샌달우드, 앰버

아쿠아 알레고리아 컬렉션은 겔랑의 조향사 티에리 바세의 말에 따르면 '풍성한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일상의 기쁨'과 '정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만들어 낸 향수라고 한다. 그만큼 천연재료를 써서 자연에 대한 찬사를 표현했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조말론이랑 비슷한 점도 있다. (실제로 향수를 맡아보면 조말론보다는 확실히 더 쿰쿰한 화장품 냄새가 나기는 한다.) 그래도 기분좋은 향수임에는 틀림없다. 일상의 기쁨을 표현하고자 했다니, 그리고 그게 강기슭 잔디 위에서의 점심식사라니, 이 얼마나 밝고 경쾌한 향수인가. ㅎㅎㅎ 

가볍고 즐거운 향이라 딱 여름에 쓰기 좋은 향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겨울에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 만다린 오렌지 냄새가 어쩐지 귤 냄새처럼 느껴지는데, 귤은 겨울에 나니까. .....아...아닌가? (뭐지 이 어정쩡한 결말은 ㅎㅎㅎ)

 

 

 

 



이렇게 괴상망측한 책은 처음 본다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책을 받았다. 바빠서 한동안 펴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시간이 조금 생겨 읽어보려고 책을 폈다가 당황해서 한참을 뒤적거렸다. 일단 제일 괴상한 점은 저자가 '곰돌이 푸'라는 점이다. 곰돌이 푸 자체가 실존하는 곰이 아닌데 저자가 곰돌이 푸라니. 

세상에 저자가 없는 책이라는 건 없다. 옛날 책을 새로 편집해서 내는 일은 있어도 원저자와 편집인의 이름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저자가 없었다. 샅샅이 뒤져서 겨우 찾아낸 것이 그나마 '옮긴이'의 이름이다. 이것도 참 괴이하다. '옮긴이'라는 것은 원저가 있는 것을 다른 언어로 옮겼을 때에나 쓰는 말이지, 대체 뭘 옮겼다고 옮긴이? 푸가 한 곰의 말을 사람의 말로 옮겼다는 건가 뭔가. 

굳이 저자를 '곰돌이 푸'라고 하려면, 사실상 푸의 저자 밀른의 책에 나온 푸의 말들을 직접 인용하는 방법도 있긴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저자는 곰돌이 푸가 아니라 밀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 보면 푸가 책에서 한 말이랑은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푸가 한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머리말에서 한 구절, 중간에 나오는 간지에나 잠시 나올 뿐, 푸가 등장하는 건 페이지마다 있는 삽화밖에 없다. 그러니까 대체 어딜봐서 저자가 곰돌이 푸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대체 이 내용들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알 수가 없다. 

괴상망측한 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머리말을 읽어보면, 갑자기 난데없이 푸우가 '논어'를 만났다고 한다. 읭? 이렇게 난데없이? 부제에도 없던 논어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가? 게다가 푸우가 대체 논어랑 무슨 상관인지. 머리말은 말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경전의 혜안을 [그러니까 논어를] 푸의 목소리를 빌려 얘기하는 거라고.그렇다면 이 책은 논어를 푸의 캐릭터를 활용해 귀엽고 쉽게 풀어 쓴 책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일단 원저자는 공자여야 한다. 그리고 논어에 나오는 구절의 원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느 책의 무슨 편에 있는 이야기인지 인용이라도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페이지를 이쁘게 꾸미느라 원문이나 각주를 넣기 싫었다면 맨 뒷 페이지에라도 서지사항이라도 나와야지, 공자에게 마땅한 지적 크레딧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하긴 저자도 자기를 옮긴이라고 하며 뒤로 숨는 판에, 공자인들 자기가 이 책의 컨텐츠의 원저자라고 하고 싶었겠나. 나오는 내용의 예시를 들어 보자면...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내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아무리 노력하고 고민해도 정말 중요한 걸 놓치기 쉽답니다. 내 마음을 먼저 돌아보세요."

"완벽한 사람을 꿈꾼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180도 바뀌기는 힘들 거예요.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끔 작은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정말 간절히 바라며 계속 노력한다면 내가 바라는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줄어들 거예요."

정말 괴이한 것은, 이딴 추상적인 얘기만 페이지 빼곡히 늘어놓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점이다. 대체 왜?!?!?! 그림이 예뻐서? 아니면 정말 이 추상적인 말들이 힐링이 되어서? 책 구성이 예뻐서? 유치원에 온 것 같아서? 


푸 원전 덕후에게는 다소 아쉬운 디즈니 삽화

이 책을 내게 준 사람은 단순히 이 책이 베스트셀러이고 내가 곰이기 때문에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내가 사실 푸의 덕후라는 것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푸를 접하기 훨씬 오래 전 나는 푸를 책으로 접했다. 밀른의 책을 번역했던 계몽사 문고의 '곰 푸우'에는 원저에 있던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삽화가 그대로 옮겨져 있었는데, 디즈니의 그림들보다 모든 캐릭터들이 훨씬 더 민둥민둥하고 단순해서 귀여웠다. 푸와 피글렛도 더 디즈니보다 민둥민둥하지만, 그 민둥한 귀여움이 폭발하는 것은 티거의 삽화에서다. 어쩐지 켈로그 호랑이를 떠올리게 하는 디즈니의 티거와 달리 셰퍼드의 티거는 딱 봐도 푸의 친구인 티거의 모델이 그냥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인형이었다는 것을 더 잘 보여준다. 이요르도 마찬가지다. 당나귀 이요르가 잃어버렸던 꼬리를 못으로 박아주는 장면은 이요르가 인형이라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민둥성(?) 혹은 '인형성(?)' 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사라진다. 즉, 원저자라는 곰돌이 푸는 심지어 밀른의 푸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푸였던 것이다.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푸 삽화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티거 


동화 덕후의 뒷조사 탐방 

그런면에서 본다면 동화 덕후가 동화작가들의 뒷조사를 하여 만든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은 충분히 독자의 덕후력을 상승시킬만한 요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내가 열심히 읽었던 동화들의 주인공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가, 저자는 어디에서 모티프를 얻어 이런 동화를 쓰게 되었는가, 이 동화들이 반영하고 있는 시대상은 무엇인가, 저자의 삶은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책의 성공은 저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작은 아씨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톰소여의 모험, 피터팬, 보물섬, 빨강머리앤, 하늘을 나는 교실, 안데르센 동화집, 그리고 푸에 이르기까지 어렸을 적에 스무번도 넘게 읽었던 동화들을, 저자는 하나씩 시대적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맞춰서 자리매김 시킨다. 작은 아씨들에서 남북전쟁에 나갔던 건 조의 아버지가 아니라 조의 실제 모델이었던 루이자 메이 올콧이었다던가, 보물섬이 이미 해적 시대가 지난지 100년쯤 지나 그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생겨날 무렵에 쓰인 것이라던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에 나타난 인젼조에 대한 인종주의적 묘사라던가. 심지어 이 저자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마크 트웨인 소설의 출판을 맡고 있던 조카사위 찰스 웹스터가 출판사 파산으로 자살하자 딸인 진 웹스터는 고아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게 <키다리 아저씨>라던가 (p.110-111), 피터팬을 쓴 제임스 매슈 배리가 가장 좋아한 작품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철들기를 거부하는 헉의 모험을 보며 피터팬 캐릭터를 구상했다던가 (p.134), 보물섬의 삽화를 그린 월터 패지트는 그 동생 시드니 패지트가 <셜록 홈즈> 삽화를 그릴 때 모델이 되었다던가 (p.152), <빨강머리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에게 마크 트웨인이 팬레터를 보냈다던가 (p. 193) 하는 얘기들 말이다 

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글들에 힐링이란 외관만 덧씌운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와 달리, 이 책은 실제로 푸의 어떤 점이 힐링을 주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장면을 들어 설명한다. 

푸의 집과 피글렛의 집 중간쯤에는 가끔 서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가서 만나는 '생각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없는 날에는 거기에 함께 잠시 앉아서, 만났으니 이제 뭘 해야 할까 궁금해 하곤 했습니다. (p.294)

어느 날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모든 사람이 이 장소가 왜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푸가 시를 지었습니다. (p. 295)

이 몇 문장의 직접인용만 봐도, 푸가 가지고 있는 힐링의 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덕후답게 푸가 주는 힐링의 포인트들을 구체적으로 짚어낸다. 구멍에 낀 푸를 꺼내기 위해 모든 친구가 힘을 모으는 장면이라던가, 꿀을 먹기 위해 구름인 척 풍선을 들고 하늘로 떠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하는 푸라던가, 티거와 푸가 함께 발자국을 추적하느라 몇바퀴를 똑같은 길을 돌았는데 알고보니 자기들의 발자국이더라 하는 에피소드들. 일상성에서 오는 사소한 행복감과 그저 존재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친구들의 친밀성. 아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가 쌩뚱맞은 논어 이야기를 하는 대신, 원전에서 푸가 했던 말들을 몇 개만 추려 인용했어도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힐링을 얻었을 것이다. 원저자가 곰돌이 푸라는 것도 조금 더 납득할만 하고. 


동화를 동심의 세계에서 구출하기

넷플릭스에서 최근 Anne with an E 라는 캐드(캐나다 드라마?)를 방영하였다. 시즌 2까지 나오면서 원작에서 서서히 멀어지긴 했으나, 시즌 1까지는 원작에 나왔던 에피소드를 적절하게 배치한데다가 앤, 다이아나, 매튜, 마릴라 등의 캐릭터를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살려냈다. 1시즌 1화를 처음 본 순간, 책으로 앤을 접한 모든 이들은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빨강머리 앤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말라깽이에 주근깨, 창백하다시피 하얀 얼굴에 반을 차지하는 큰 눈, 상상과 현실 어드메쯤을 헤메고 있는 눈빛, 쉴새없이 조잘거리면서 놀라운 표현들을 드라마틱하게 뱉어내는 앤. 고증에 충실하게도 Anne with an E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직접 가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동화를 현실처럼 구현해 내고자 한 것이었다면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텐데, 이 드라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넷플릭스 캐드 'Anne with an E'

앤이 실제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살고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에 대한 고민을 제작진은 엄청 많이 했을 것이다. 앤이 고아로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왔을 때 겪어야 했을 편견과 차별, 그 커뮤니티 안에 속하기 위해 했어야 했을 노력들까지를 Anne with an E는 세세하게 그려낸다. 다이아나의 엄마가 다이아나와 앤을 못 놀게 했던 것은 단순히 딸기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그저 스토리로서 읽을 때는 단순히 베프인 다이아나와 못 놀게 된 것이 아쉽고 가슴 아팠다면, 현실적인 맥락에 앤을 위치시키고 나니 그런 에피소드 뒤에 있었을 배경이 보인다. 덕후 제작진은 아마 그 뒷배경을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앤의 초경도 마찬가지다. 원작에는 앤이 11살이고 캐드에는 13살로 나오지만, 앤도 분명 초경을 겪었을 것이다. 충격도 받았을 것이고 드라마에서처럼 마릴라에게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발랄하면서도 우울하기도 하고, 과장된 언어를 사용하고, 드라마퀸인데다가 징징거렸다가 금방 들뜨기도 하는 성격이지만, 동시에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해서 몸에 밴 성숙함도 있는 캐릭터가 앤이다. 다이아나의 동생 미니메이의 후두염을 간호한다던가 하는 모습에서 그런 면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성숙함의 배경에는 분명 '고생'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고생. Anne with an E는 거기까지 파고든다. 그래서 앤이 어린 나이에 겪었을 정신적 육체적 학대까지 그려낸다. 이것은 앤의 독특한 성격 - 상상력이 유달리 풍부하고 현실을 떠나 꿈 속에 있는 것 같은 - 에 맥락을 부여한다. 즉, 앤이 만들어내는 상상과 환상의 세계가, '고생'을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쯤 되면 빨강머리앤의 팬들 - 특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팬들 - 은 '이건 나의 앤이 아냐!' 라고 충격과 공포에 빠져든다. 그러나 애니메이션보다 책을 수십번쯤 읽었던 원전 덕후로서, 나는 오히려 이 드라마가 앤 이야기에 현실적인 맥락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동화가 그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아름다운 것으로만 남길 바란다면, 동화는 아마 아름다운 채로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아우라를 뿜으며 그대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화를 현실의 반영으로 읽기 시작한다면, 동화는 여전히 내 현실과 일상과 세계 속에 살아 숨쉬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사랑했던 동화들은, 그 동심의 아우라 속에서 빠져나왔을 때도 충분히 보석처럼 빛난다.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선택을 하겠지만, 나라면 보석처럼 내 일상의 지금 이순간에 빛나고 있는 그 동화들을 붙잡겠다. 

갑자기 넷플릭스의 캐드 얘기를 해서 당황스럽겠지만, 이 책도 사실 같은 맥락의 책이다. 우리가 수십번씩 읽었던 그 책이 작가의 어떤 삶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식을 학대하다시피 했던 올콧의 아버지나, 앤 시리즈를 그 딸인 릴라 이야기까지 써야했던 몽고메리, 피터팬의 모델이 된 소년의 비참한 말로, 톰소여의 인종주의와 안데르센의 리플리 증후군이 그 동화들이 가지고 있던 동심의 아우라를 흐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가들의 비루하다면 비루한 삶을 통해서도 이런 동화가 만들어지고, 그 동화가 또 후대에 두고두고 읽히며 나에게까지 닿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의 현재의 비루한 현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내 비루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동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내게는 힐링이다. (곰돌이 푸인 척 하는 공자가 늘어놓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힐링이 아니라 이게 힐링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정말 안데르센의 컴플렉스인가요?

미운 오리 새끼는  제목에 무려 '새끼'가 들어가는 어린이에게 다소 적합치 않은 제목을 가진 안데르센의 대표작이다. 어렸을 때는 그저 아 놀림받던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되다니 정말 잘 됐다 정도로 생각했다면, 크면서는 점점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게 미운 오리 새끼는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놀림받는 존재다. 백조 새끼가 딱히 오리 새끼보다 더 못생겼을 이유도 없건만, 다른 오리 새끼들이 백조 새끼 (아니 미운 오리)를 따돌리는 이유는 그저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백조 새끼는 어떻게든 오리들의 세계에 끼어들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닌다. 그런데 오리들의 기준은 백조와는 다르다. 아무리 백조가 노력해도 오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백조인데도 불구하고 오리들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했던 백조 새끼는 결국 자기가 백조라는 걸 알게 된다. 오리들과는 다르게 살도록 디자인 된 백조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미운 오리 새끼>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놀림받고, 남들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깎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수많은 백조새끼들이, 자기만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기 삶을 살기 위해 날아오르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게 안데르센의 컴플렉스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자기가 귀족의 자제이며 천재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런데 천재는 맞는 거 아닌가? 미운오리 새끼도 그렇고 성냥팔이 소녀도 그렇고 벌거벗은 임금님도 그렇고 이 정도면 난 놈이지), 미운 오리가 딱 그렇다는 것이다. 오리새끼가 따돌림 당하는 이유는 못생겼기 때문이고, 오리 새끼는 외모지상주의 세상의 가치관을 본인도 받아들이며, 고난의 극복도 주인공의 별다른 노력도 없이 알고보니 백조였다는 식으로 결말이 나는데, 이것은 안데르센이 가진 '나는 애초에 귀한 혈통을 가진 존재인데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과 지내다보니 인정받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라는 안데르센의 무의식이 반영된 거라는 것이다. 저자의 뒷배경을 아는 것은 종종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저자의 삶이 '컴플렉스'라는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없듯이 그의 작품도 그의 독특한 기행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삶과 책의 내용을 연결짓기 위해 작위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인데, 저자는 안데르센의 열등감과 천재라는 자신감, 불안감과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벌거벗었음에도 행진을 계속하는 왕의 캐릭터를 통해 나타나며, 귀족들이 자신들의 지위에 걸맞은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멍청하다는 사실을 까발렸다고 한다. 신선한 해석이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역시 작위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자는 안데르센에 대한 전기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안데르센이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이자 비천한 배경, 불확실한 성정체성,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으며 못생긴데다가 눈치도 없는 사람이었고, 그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안데르센을 너무 쉽게 프로파일링 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웃사이더라면 누구나 비참한가?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이 평생 독신으로 사는 건가? 친구집에서 머무르다가 그 친구 부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언은 오히려 그 친구부부와의 친밀감을 보여주지는 않는가? 벌거벗은 임금님도 사실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할 때 혼자 보이는 대로 사실대로 말한 소년으로 인해 금기가 깨지는 통쾌함에 대한 얘기가 될 수는 없는 걸까.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해도 좋다는, 비주류여도 괜찮다는, 비주류의 거친 시각이 때로는 주류가 눈감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는, 그런 이야기로 해석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안데르센을 '비주류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누가 봐도 사회의 비주류였던 그와 그의 고통을 그저 비참한 컴플렉스의 화신으로 치부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시각이 조금 불편하다. 마이너리티는 분명 매저리티가 볼 수 없는 시각으로 사회를 바꿔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키다리 아저씨도 써 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즐겁다. 왜냐하면 덕후가 자기가 덕질하는 것들을 눈빛 빛내며 설명할 때 느껴지는 그 매력이 책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키다리 아저씨>에 나온 아저씨가 알고보니 사회주의자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충격은, 단순히 충격이 아니라 설렘이기도 했다. 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던 역사와 연결되는구나- 하는 기쁨이기도 했고, 마치 별세계 얘기와 같았던 주디의 이야기를 그 시대적 맥락에 위치시킬 때 현실감이 반짝반짝 살아올랐기 때문이다. 우울한 수요일과 주디가 그린 삽화로 시작하는 그 즐거운 책의 뒷배경을 더 알고 싶다. 어디 <키다리 아저씨> 뿐이랴. 메리 포핀즈를 쓴 트래버스의 이야기도 꽤나 드라마틱하고 (그 뒷이야기가 Saving Mr. Banks라는 영화로 나왔는데, 사실왜곡과 디즈니 미화가 심하다고 말이 많았다), 어린 왕자라던가, 책에도 언급되었던 에밀과 탐정, 어렸을 때 사랑했던 동화는 정말 무궁무진한 꿀잼 확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키다리 아저씨를 머리말에 언급했으니, 아마 이 책이 성공하면 다음 책도 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오늘의 주절주절 길기도 한 리뷰는 여기서.... 


끗.




1. 불가리 오 떼 베르

전반적으로 시원한 향이라서 여름에 쓰기 좋은 향수다. 세련되고 은은한 향이다. 

첫 향의 시트러스 향은 다른 레몬향들처럼 톡톡 튀지 않고, 대신 쌉싸름한 냄새가 무게감을 잡아줘서 은은하고 잔잔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얼마전 면접 보러 갈 때 이 향수를 살짝 뿌렸다. 도시적인 느낌의 얌전한 향수다.

2018/03/30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12) 녹차 냄새가 나는 향수 - 불가리 오 떼 베르



2. 조 말론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

조말론 향수들은 다 똑같이 생겨서...ㅎㅎㅎ 사진을 올려봤자 ㅋㅋㅋ 

아무튼 여름에 좋은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 첫 인상은 그냥 무난하다고만 생각했지만, 의외로 몇달 지나니 자주 뿌리게 되는 향수다.

첫향에서는 서양배 향이 강하고, 뒤로 갈 수록 프리지아 향이 세지는데,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건 서양배 향 때문인 것 같다. 살짝 쌉쌀하고 시원한 느낌. 

레이어링을 이거저거 해 봤지만, 다른 향수랑 레이어링 하는 것보다는 그냥 이거 하나만 쓰는 게 좋은 것 같다. 

2018/03/14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7) 내가 좋아하는 향과 나에게서 났으면 하는 향이 다를 때 - 조 말론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잉글리시 오크 앤 레드커런트,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


3. 프레쉬 브라운 슈가 오 드 파퓸


리뷰한지 얼마 되지 않은 브라운 슈가. 상큼 달달하므로 기분전환에 좋지만, 면접을 보러가거나 할 때는 삼가하는 게 좋다. ㅎㅎ 

상큼 달달 시원한 느낌이라서 여름에 발랄한 기분을 내고 싶을 때 좋을 것 같은 향수. 어디 놀러가거나 바람쐬러 가거나 할 때 좋을 것 같은 향수다. 

2018/05/28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19) 독하지 않고 말 그대로 프레시한 상큼달달 향수 - 프레쉬 브라운 슈가 오 드 파퓸





최근 친구의 결혼 선물 등으로 조말론 매장을 몇번 들락거리다 보니 이제 웬만한 조 말론 향들은 다 맡아본 것 같다. 처음 맡은 향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조 말론은 다 좋은 줄 알았는데, 가서 맡아 보고 샘플을 얻어와 뿌려보고 하다보니 꼭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좋아하는 향들이 뭔지 알아냈고, 나머지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면서 조 말론 및 향수에 대한 관심이 뚝 식어버리고 말았다. (?!) 하지만, 친구의 결혼선물 및 내 자신에게 주는 선물(?!) 등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여러 샘플을 갖게 되었다. 그 중에 예전에 리뷰한 적 없던 두 향, 조 말론 얼그레이 앤 큐컴버조 말론 피오니 앤 블러시 스웨이드 두 향을 리뷰해 보려고 한다. 둘 다 매장에서 맡아보고 나쁘진 않지만 또 그렇게 좋지도 않다...라고 생각했던 향이다. 

조 말론 피오니 앤 블러시 스웨이드 (Jo Malone Peony and Blush Suede)


조 말론 피오니 앤 블러시 스웨이드는 물이 많이 섞인 꽃향기이다. 꽃 중에서도 달달한 향이 많이 나는 꽃. (아마도 피오니인 것 같다. 피오니는 작약).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꽃향기 느낌이라서 무난히 사랑받을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향이 평범하진 않다. 꽃 향기 너머로 생일 초 불어서 끄자마자 나는 약한 탄내가 느껴진다..(대체 왜?!;;; 하지만 진짜다, 맡아보셈) 조 말론 향수 중에서도 꽤 인기가 많은 향이라고 들었는데, 소녀시대 써니가 뿌렸다나 뭐라나. 물이 많이 섞인 향이라서 잘못 맡으면 약간 울렁거릴 수도 있다. 탑노트는 사과라는 데 전혀 사과향은 모르겠다. (내가 막코라서 그럴 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대부분 스쳐 지나가듯 향수를 맡는 일반인들은 막코니까 괜찮다 ㅎㅎ) 스웨이드 향은 노트 설명에도 그렇고 다른 리뷰에도 그렇고, 실제로 스웨이드 냄새라기보다는 그런 질감이라는 뜻에서 넣은 듯 하다.


조 말론 얼그레이 앤 큐컴버 (Jo Malone Earl Grey and Cucumber)

얼그레이 앤 큐컴버는 솔직히 내 코에는 오이 같지도 않고 홍차 같지도 않다. 시트러스 계열로 분류되어 있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솔직히 시트러스 향 같은 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 스파이시한 느낌의 머스크한 향이 첫 향부터 강하다. 시원하다기 보다는 따뜻한 향인 것 같다. 탑노트에서 강하던 머스크가 뒤로 가면 조금씩 사라지고, 그제서야 버가못 향이 좀 나기 시작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향이 살짝 나면 세련된 느낌이 들 것 같긴 하다. 역시 나쁘진 않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이제 있는 조말론 향수 샘플들을 가지고 레이어링을 해 보자.


조말론의 프래그런스 컴바이닝에 나와있는 가이드에 따르면 얼그레이 앤 큐컴버 레드 로지즈랑 레이어링을 하도록 권하고 있어서 한번 해 보았다.결과는 역시 그냥 그렇다. 레드 로지즈의 톡 쏘는 향이 너무 강해서, 그게 얼그레이 앤 큐컴버의 강한 머스크향과 함께 역시 코를 찌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조 말론은 레이어링을 하면 무조건 좀 더 풍성해지기는 하는 것 같았다. 향긋한 느낌이 조금 더 살아나긴 한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조 말론에서는 이런 조합을 나름 싱그럽거나 신선함이 더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 레드 로지즈 미안하지만 정말 너는 내게는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구나.

역시 조말론 웹사이트의 조언에 따라 피오니 앤 블러시 스웨이드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와 레이어링 해 보았다. 여전히 피오니 향이 강하게 나긴 하지만 그래도 싸한 잉글리시 페어 향이 더해지니까 향이 더 시원해지고 달달한 향이 좀 더 살아난다. 나쁘지는 않은 조합인 듯 하다. 피오니 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것도 좋아할 수도. 개인적으로는 피오니 향이 아무래도 타다남은 양초 같아서 별로다.. ㅎㅎㅎ 


피오니 앤 블러시 스웨이드우드 세이지 앤 씨 쏠트 역시 조말론에서 권장하는 조합이다. 우드 세이지 앤 씨 쏠트는 사실 다른 향수들이랑 조합하기에 꽤 좋은 향인게 전반적으로 단조로우면서도 자몽향 같은 과일향이 살짝 돌고 있어서, 과일향이나 꽃향이 나는 다른 향수랑 뿌리면 과일향을 확 풍성하게 해준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블랙베리 앤 베이랑 특히 잘 어울린다. 그런데, 피오니랑은 정말 왜 권장 조합인지 모르겠을만큼 따로 노는 것 같다. 오히려 우드 세이지 씨 솔트에 있는 자몽향 보다는 소금향이 확 오는데, 그러다보니... 생일초 타다 남은 데 소금 뿌린 것 같은 향이 난다;; ㅎㅎㅎ 물론 주관적인 평이지만...ㅎㅎㅎ 아무튼 이 조합도 내 취향은 아닌 걸로. ㅎㅎ


어쨌거나, 현재로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 말론 조합은

블랙 베리 앤 베이 + 우드 세이지 앤 씨 쏠트 (일명 블베베+우세솔 조합)

블랙 베리 앤 베이 + 잉글리시 오크 앤 레드커런트 (일명 블베베 + 잉오레 조합) :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보다 레드커런트가 훨씬 더 블베베와 잘 어울린다. 아마도 레드커런트에서 나는 과일향을 블베베가 풍성하게 살려줘서 그런 것 같다. 

이다..

그리고 단독으로 뿌리기에 제일 좋아하는 건 여전히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 넛

잉글리시 오크 앤 레드커런트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

블랙 베리 앤 베이 

이렇게 네 가지. ㅎㅎ 아마 한동안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조말론에 대한 예전 포스팅은... 

2018/04/05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16) 역시 요즘 최고의 장난감 - 조 말론 향수들을 레이어링 해 보자

2018/04/03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15) 조 말론의 다른 향들이 궁금해졌다 (2) - 조 말론 라임 바질 앤 만다린, 미모사 앤 카다몸, 레드 로지즈, 벨벳로즈 앤 우드, 튜버로즈 안젤리카

2018/04/01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13) 조 말론의 다른 향들이 궁금해졌다 - 조 말론 다크앰버 앤 진저 릴리, 블랙베리 앤 베이, 우드 세이지 앤 씨쏠트

2018/03/14 - [향.알.못의 향수탐색] - 향탐기록 (7) 내가 좋아하는 향과 나에게서 났으면 하는 향이 다를 때 - 조 말론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잉글리시 오크 앤 레드커런트,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




프레시 브라운 슈가 오 드 파퓸 (Fresh Brown Sugar Eau de Parfum)


  • 탑 노트: 시칠리안 레몬(Sicilian Lemon), 탠저린(Tangerine), 아싸이(Açaí)
  • 하트 노트: 달콤한 매그놀리아(Sugared Magnolia), 은은한 허니서클(Sheer Honeysuckle), 복숭아 넥타(Peach Nectar)
  • 베이스 노트: 카라멜(Caramel), 웜 엠버(Warm Amber), 사이프러스(Cypress)


사실 조 말론에 한참 빠져든 이후 다른 향수들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말론의 자연적이고 담백한 향들에 비해서 다른 향수들은 대개 좀 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새로 눈에 들어온 향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프레시 브라운 슈가였다. 예전에 Sugar Rose향 립밤 같은 걸 선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향이 마음에 들어서 프레시를 기억하고 있었고, 얼마전 친구와 매장에 갔을 때 이거저거 향을 맡아보았다. 프레시 향수들은 전반적으로 이름 그대로 'Fresh'하다. 가볍고 상큼한 과일향 꽃향이지만 인위적이거나 독하지 않고, 달달한 느낌은 있지만 지나치게 달지는 않았다. 가서 캐나비스 로즈, 슈거 리치 등의 향도 맡아 보았는데, 전반적으로 오 상큼한데?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유달리 브라운 슈가가 마음에 들었다.

브라운 슈가는 이름만 들으면 엄청 달달할 것 같다. 베이스 노트에도 '카라멜'이 들어 있어서 더욱 그럴 것만 같은데, 의외로 별로 달지 않고, 오히려 상큼한 느낌이 강하다. 신선하게 잘 익은 과일 향이라고 해야 하나. 전반적으로 복숭아 아이스티 같은 향이다. 첫향에서는 레몬 향이 강하지만, 그렇게 가볍지 않고 살짝 묵직한 시트러스 향이다. 노트에는 없지만 나는 버가못 향이랑 비슷하다고 느꼈다. 자몽이랑 복숭아향도 나는 것 같다. 미들노트에 나와있는 허니서클은 원래 아주 달착지근한 향이 나야 하는데, 이 향수에서는 허니서클 향이 나는지도 잘 모르겠을 만큼 약하다. 카라멜 향도 거의 나지 않는다. 오히려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베이스노트는 비누향 같은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상큼한 느낌의 향수다. 봄여름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다. 랑방 잔느나 에끌라 다르페쥬랑도 비슷한 느낌의 향수지만, 랑방보다 훨씬 덜 독하고 더 자연에 가까운 향이 나고, 랑방보다 좀 더 상큼한 느낌이 강하다.



동생네 갔을 때 동생이 가지고 있는 샘플들을 모조리 부어주는 바람에 샘플을 한 스무개쯤 들고 돌아온 것 같다. 동생도 본인이 좋아하는 걸 수집한 게 아니라 뭐 어디 사은품으로 나눠준 것이기도 하고, 나도 내 취향대로 모은 게 아니라서 종류가 아주 뒤죽박죽이다. 남자 향수도 많이 섞여있고, 여전히 향알못인 내게도 벅찰만큼 내 스타일이 아닌 향수들도 섞여 있어서 나름 소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여튼, 오늘의 향수는 동생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샘플을 무려 네개나 모아놓아서 궁금한 김에 뿌려본 돌체 앤 가바나의 돌체 우먼 EDT

돌체 앤 가바나 돌체 우먼 오 드 뚜알렛 (Dolce and Gabbana Dolce Woman Eau de Toillet)

돌체 우먼. 오이 냄새에 멜론 냄새가 섞인 것 같은 향이 난다. 시원한 것 같긴 한데 독하진 않은 편이다. 노트 정보를 보면 

탑노트: 네롤리, 파파야 플라워

미들노트: 화이트 아마릴리스, 수선화, 수련

베이스 노트: 머스크, 샌달우드

...라고 하는데 사실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나한테는 오이 냄새 ㅋㅋㅋ 잔향이 약한 것 같다. 


동생이 모아놓은 돌체 우먼 샘플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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