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뭐 뿌리셨어요?"
커피집 직원이 물었다. 조 말론 블랙베리 앤 베이와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을 레이어링해서 뿌린 날이었다. 이렇게 긴 이름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읊어주고 나니 본인이 향수에 관심이 많노라며 우디한 향을 좋아한다고 했다.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향을 좋아하지만 남자 스킨냄새 같은 면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는데 칭찬을 받으니 갑자기 잉오헤에 대한 자신감이 한껏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분이 말했다.
"저는 톰포드를 좋아해요."
톰포드라. 니치 향수에 대해 조사할 때 한쪽 귀로 자주 들었던 이름이긴 한데, 조말론에 꽂히는 바람에 다른 쪽 귀로 날아가버린 그런 향수 브랜드였다. 톰포드에도 잉글리시 오크 같은 향수가 있으려나 싶어서 물어봤다.
"톰포드는 뭐가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건 패뷸러스요."
그러나 귀가 어두운 나는 또 잘못 알아듣고...
"히글러스요?" (내가 말해놓고도 어쩐지 굉장히 흉악한 향이 날 것 같은 향수 이름이었다. ㅎㅎㅎ)
여튼, 그래서 도서관에 오는 길 신세계 면세점들을 지나가다가 톰포드에 가서 한번 맡아본, 톰포드 XX 패뷸러스.
톰포드 패뷸러스는 사실 차마 부르지 못할 이름을 가지고 있는 향수였다. 마치 디자인인 것처럼 빨간 줄로 그어진 저 부분에는 사실....
원래 이름인 욕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ㅋㅋㅋㅋ 아니 향수 이름에 F-word 를 넣으면 어떻게 부르란 말이냐. 그래서 70년대도 아닌데 한국에 들어올 때 검열을 거쳐 F단어 에 빨간 줄을 그어 들어온, 톰포드의 패뷸러스 (영어이름은 퍼킹 패뷸러스, 직역하면 '겁나 멋짐' 정도 되겠다).
그래서 어땠냐고? 음. 예상 밖의 냄새가 났다. 일단 조말론의 잉글리시 오크와는 아예 계열이 다르다. 베이스 노트에 화이트 우드가 들어가 있긴 하고 매캐한 향이 나기는 하지만 오히려 조말론으로 치면 Myrr and Tonka 라던가 하는 인텐스 계열 향과 비슷한 느낌이다. 매캐하고 살짝 달달한 바닐라 향이 난다는 점에서는 다크앰버 앤 진저릴리와 비슷하지만 거기에 가죽냄새와 약간의 쇠냄새(?)도 섞인 듯 해서 좀 더 남성적으로 느껴진다. 웬지 아랍 향신료같은 인상은 비슷하다. ㅎㅎㅎ 흔히들 관능적인 향이라고 한다는데 '관능적인 향'이라는 게 뭔지 나는 아직도 당췌 모르겠다. 확실히 화려하고 강렬한 향인 건 알겠다. 하긴 다크앰버 앤 진저릴리도 처음에 맡았을 때는 '읭' 했지만 지날 수록 조금 중독성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으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향수 역시 더 맡다보면 좋아하게 될 수도.
아래는 노트 정보다.
탑노트: 라벤더, 세이지
미들노트: 가죽, 바닐라, 비터 아몬드
베이스 노트: 통카 빈, 앰버, 레더, 캐시미어, 화이트 우드.
덧:
왼쪽 손목에는 톰포드의 패뷸러스를, 오른쪽 손목에는 크리드 어벤투스 포 허를 뿌리고 도서관에 왔다. 뿌리자 마자 코를 댔더니 예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상큼한 과일향이 안 느껴지길래... 너무 예전에 과대평가를 했었나? 하고 생각하며 왔는데... 일하다보니 정말 아름다운 미들노트가 훅 치고 올라온다. 이건 사과향이랄지 꽃향이랄지. 은은하고 여성스러운 듯 하면서도 발랄한 그 느낌. 아.. 어벤투스 포 허... 네가 진짜 15만원만 더 쌌어도... (너무 깎았나? ㅎㅎㅎ) 언젠가는 꼭 사고말테다, 치토스.
덧 2:
양 손목에 두개의 다른 향수를 뿌렸으니 차마 어디에 더 뿌리지는 못하고... 조말론에 갔다가 신상인 파피 앤 발리를 시향지에 뿌려 들고 왔다. 파피 앤 발리는, 예전에 한정판으로 나온 '잉글리시 필드' 시리즈 중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던 향을 온고잉 상품으로 만든 거라고 한다. 잉글리시 필드 시리즈는 한번도 못 맡아보다가, 얼마전 친구가 들고 다니던 그린 어쩌구 (...향수 블로그에서 이게 쓸 표현인가) 가 참 좋았던 기억이 나서 파피 앤 발리도 한번 맡아봤는데... 곡식 냄새 많이 나고 약간은 쿰쿰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조 말론은 참 자연적이어서 좋단 말야. 조 말론 매장에 간 김에 요즘 살짝 눈길을 주고 있던 오우드 앤 버가못도 시향지에 뿌려서 들고 왔는데, 역시 좋다. 다음에는 오우드 앤 버가못 손목에 뿌려봐야지. ㅎㅎ
이사 오고 나니 내 동선에 신세계가 있어서 향수탐방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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