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에서 내려 도서관 가는 길에 신세계 면세점을 통과하는데 언제나 여러 향수브랜드 부스가 즐비한 향수골목을 지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눈길만 흘깃 줘도 후다닥 앞으로 나와 뭘 찾으시냐 묻는 직원이 부담스러워서 어버버 하다가 도망가곤 했지만 어느새 나도 서울시민으로 정착한지 세달쯤 되지 않았나. 그러니까 뻔뻔하게 이거 저거 시향해 볼 수 있을까요? 하면서 사지도 않을 향수를 맡아보고 뿌려본다. 예전에 아마존 등으로 미니어쳐를 구해서 향수를 맡던 시절에 비하면 참 얼마나 향수시향이라는 취미생활에 도움이 되는 환경인가. ㅎㅎ 여튼 한참을 크리드 시향에 빠져 있다가 크리드 직원 언니가 내 얼굴을 알아볼 때쯤 된 거 같아서 요즘 살짝 발길을 돌린 곳이 바이레도 부스. 요즘에는 유명하다는 블랑쉬와 라튤립, 집시워터, 모하비 고스트, 블랙 사프론 등을 맡아보았다. 그 중에서 오늘 쓰려는 향수는 발다프리크.
발다프리크를 시향한 이유는 어느 웹사이트에선가 발다프리크가 메종 마르지엘라의 바이 더 파이어플레이스와 비슷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이상하게 파이어 플레이스에 꽂혀 있는데, 그게 그렇게 중독성 있는 향이었나 자꾸 맡아보고 싶고 생각나고 그런다. 그런데 한국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미국에서 사왔어야 해- 하고 울며 땅을 치는 아이템이다. 아무튼 아쉬운 마음에 자꾸 파이어 플레이스를 검색해 보는데 비슷한 향으로 바이레도 발다프리크가 종종 언급되길래 궁금해져서 오늘은 반드시 바이레도 부스에서 발다프리크를 시향해 보리라 하는 기대감을 안고 발다프리크 시향지를 들고 도서관에 왔다.
그런데 응..? 향이 전혀 다르다? 파이어 플레이스는 장작에 군밤타는 냄새 비슷한데 일단 여성 향수는 확실히 아니고 심지어 남성 향수라기에도 너무 탄내라서 그냥 군밤의 향수다. ㅋㅋㅋㅋ 그런데 바이레도는 탑노트는 딱 향긋한 여성향수 느낌이다. 버가못과 레몬이 탑노트에 들어가 있는데 오히려 내 코에는 좀 고급진 데메테르 퍼지 네이블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복숭아와 크림 맛이 반씩 섞인 추파춥스 같은 향 혹은 휘핑크림을 얹은 피치코블러 같은 향이라고 생각했다. 미들노트에서는 시트러스 향이 훅 사라지면서 달달하고 향긋한 바닐라 같은 냄새가 남는다. 잔향에서는 바닐라가 잦아들면서 서서히 나무냄새로 바뀐다.
노트정보는 다음과 같다.
탑 노트 ㅣ 아프리칸 메리골드, 베르가못, 레몬, 네롤리, 천수국부쿠
미들 노트 ㅣ 시클라멘, 재스민, 바이올렛
베이스 노트 ㅣ 블랙앰버, 모로칸 시더우드, 머스크, 베티버
아무튼 나에게 발다프리크의 전반적인 인상은 퍼지 네이블 게열이라는 거다. 물론 단일노트인 퍼지네이블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급진 향이지만 계열이 그렇다는 거다. 예전에 무슨 뷰티 프로그램에선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향수로 퍼지네이블을 꼽았다고 하는데 향이 달달하고 부드러워서 청순하기도 하고 아기향수 느낌도 나고 그래서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발다프리크도 내게는 비슷한 느낌이다. 튀지 않게 상큼하고 부드럽고 달다. 좋은 향수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군밤 향수를 그리워했던 나는 못내 아쉬웠다.
바이레도만 시향하기 아쉬워서 모하비 고스트도 시향지를 들고 왔다. ㅎㅎㅎ 모하비 고스트의 탑노트에서는 꽃냄새와 함께 물냄새가 났다. 나는 물비린내에 취약해서 물과 관련된 향수는 거의 무조건 멀미를 한다고 보면 되는데, 그래도 여타 물 관련 향수들에 비해 물 비린내가 심한 편은 아니었다. 레플리카의 플라워 마켓에서 나는 물냄새 비슷하게 꽃잎에 맺혀있는 싱싱한 물방울 느낌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역시 물 냄새는 내 취향은 아닌 듯. 아니 모하비 고스트라며. 모하비는 사막인데 왜 물냄새가...) 코를 대고 맡으면 좀 괴롭지만 팔락팔락 시향지를 흔들어 보면 매우 좋은 냄새가 났다. 그래도 탑노트는 꽤 은은한데 미들노트에서는 훅 하고 각종 꽃냄새가 치고 올라온다. (각종 꽃냄새라니 정말 무성의한 표현력이군 ㅎㅎㅎ) 내 코에는 장미 같은데 노트 정보에 따르면 목련이라고 하니 목련인걸로. ㅎㅎㅎ 노트 정보는 아래와 같다.
탑 노트 ㅣ 암브레트, 네스베리
미들 노트 ㅣ 매그놀리아, 샌달우드, 바이올렛
베이스 노트 ㅣ 시더우드, 머스크, 앰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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