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새로운 향수들을 이거저거 시향해 보고 있지만 그래도 한바퀴 빙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듯 항상 조말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조말론의 향들은 다른 향수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화장품 냄새 같은 인공적인 향기가 덜 하고, 프루티 플라워 계열도 그렇게 심하게 달거나 독하지 않아서다. 

오랫동안 조말론의 향수를 시향하면서 이제 조말론의 거의 모든 향수들을 맡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 '싸한' 향이 나는 향수들은 정말 너어어어어어무 좋다. 여타 브랜드의 향수들이 흉내낼 수 없을만큼 좋다. 대표적인게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의 페어향, 그리고 블랙베리 앤 베이의 월계수 향 같은 것들이다. 조말론의 '알싸한' 그 향들은 시원하면서도 중성적이어서 꽃이건 과일이건 너무 달지 않게 향을 잡아준다. (2) 가끔 예상을 깨며 '톡 쏘는' 향들을 만들어낸다. 장미향이나 바질향이라면 대부분은 뭉게뭉게 부드러우면서 훅 치고 들어오는 향이기 마련인데, 조말론의 바질향이나 장미향 같은 건 '톡 쏘는'향이라서 시고 강렬하다. 내 취향에는 그저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대표적인게 라임 바질 앤 만다린, 그리고 레드 로지즈, 벨벳 로즈 앤 오우드 같은 것들. (3) 물 계열의 향들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 같지만 나한테는 멀미가 심하게 나서 아예 시향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대표적인 것들이 와일드 블루벨, 피오니 앤 블러시 스웨이드. (4) 마지막으로 우디하고 시원한 향들이 있는데 그 향들은 남들이 자꾸 남자향수 같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나한테는 너무 매력적이다. 대표적인 게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 넛, 잉글리시 오크 앤 레드커런트. 그리고 오늘 리뷰할 오우드 앤 베르가못이다. (조말론 웹사이트에는 헤이즐넛은 스파이시로, 레드커런트는 프루티로 분류가 되어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두 향수 다 잉글리시 오크 향이 제일 세다. -_-) 

조 말론의 향수들 중 까만 병에 담겨있는 향수들을 '인텐스' 콜롱이라고 한다. 이 계열의 향수들은 전반적으로 우디하고 매캐하다. 오우드 앤 베르가못은 역시 우디하고 매캐한 맛이 있으면서도 첫향부터 끝향까지 아주 시원하고 깔끔한 향이 난다. 첫향에서는 살짝 버가못의 상큼하고 달달한 향이 난다. 버가못 답게 그렇게 시거나 심하게 달지 않고 대신 달달하고 시원한 느낌이다. 시더우드는 노트 정보에는 미들노트부터 나는 걸로 되어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전반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디한 향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우디하면 살짝 건조한 느낌이 들기 쉽지만 그럼에도 버가못 때문인지 그렇게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미들노트부터 어디서 맡아본 거 같은 향긋한 냄새가 낮게 깔리기 시작하고 뒤로 갈 수록 더 진해진다. 오우드가 뭔지 모르겠어서 이게 오우드인가 싶었는데... 이걸 어디서 맡아 봤더라... 하고 생각해보니, 서예할 때 먹물에서 나던 냄새랑 비슷하다. 도서관에서 시향지 옆에 놓고 글 쓰고 있었는데 누가 옆에서 붓글씨 쓰는 줄. ㅎㅎㅎ 이렇게 써 놓으면 의잉? 어찌 그런 향이 몸에서 나길 바란단 말이오?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 선비의 향기라고 할까? ㅋㅋㅋㅋ 그보다는 나무 향이 강하고 향긋한데 버가못 때문에 세련미가 더해져서, 선비는 선비라도 센스있고 세련된 선비라고 해야할까. (대체 뭐라는 거야ㅋㅋㅋ). 어쨌건 중요한 건 코가 즐겁다는 것이다. 다른 시향지랑 비교해서 맡아봐도 역시 오우드 앤 버가못 시향지를 맡을 때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음에 든다. 

탑노트 : 베르가못

미들노트: 시더우드

베이스노트: 오우드 

다만... 아무리 맡아도 남자 향수라는 게 문제다. 잉글리시 오크 시리즈 정도로 남자 스킨 냄새 같은 건 아니지만, 당장 오우드 앤 베르가못으로 검색만 해도 '남자 향수 추천'이라는 사이트들이 제일 위에 뜬다. 아니 대체 왜 내가 좋아하는 향수들은 다 남자 향인거야. 잉글리시 오크 시리즈도 나는 여전히 너무 좋은데 언니는 남자향수라고 뿌리지 말라고 한다. 내가 '커피집 직원이 좋다고 뭐 뿌렸냐고 물어봤어' 라고 했더니 언니는 말했다. '자기가 뿌리고 싶어서 물어봤나 보지~!!' ㅋㅋㅋㅋ 

어쨌거나 훅 치고 들어오는 꽃냄새나 과도하게 상큼달달한 과일 계열 향수들은 내게 종종 곤혹스럽다. 물 냄새가 섞여있는 꽃 냄새들은 독하지는 않지만 멀미가 난다. 그리고 나는 자꾸 시원하고 알싸한 향에 끌린다. 그리고 나무냄새가 좋다. 그러다보니 자꾸 남자향수를 좋다고 하나 보다. 여성스러운 향인데도 내가 반했던 향은 딱 크리드 어벤투스 포 허 하나인데 그건 인간적으로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다. =_=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래도 내 코가 즐거운 대로 남자 향수를 뿌리고 다니려 한다. 기다리시오, 오우드 앤 버가못. 내가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저축하여 곧 그대를 맞으러 가리다. 그런데 그대도 꽤 비싸오. 인텐스 계열 콜롱들은 대체 왜 그렇게 비싸오. 솔직히 지속력도 별로잖소. 물론 나 같은 향탐생들에게야 지속력 짧은게 또 매력이긴 하오만. 

덧1:

오우드 앤 버가못은 뭐랑 레이어링 하면 좋아요? 라고 매장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매장 직원이 '조말론의 모든 향이랑 다 잘 맞아요'라는 정말 무성의한 답변을 해 주었다. 조말론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니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이랑 잘 어울린다고 하던데. 나는 두 향을 다 좋아하니 그렇게 레이어링 해 볼 용의는 있다.... 다만 남자향수 + 남자향수가 여자향수가 될리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만.  

덧2:

언니가 좋아한다는 다크 앰버 앤 진저릴리도 시향지를 가져와 다시 시향해 보았다. 매캐하면서도 어딘가 우드 세이지 앤 씨솔트 같은 부드러운 향과 함께 꽃향기 같은 것도 풀풀 난다. 그런데 약간 짠내가 난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꽃향기 같은 것 때문에 인텐스 계열이라도 이건 좀 여성향수 같은데 말이지. =_= 

"향수 뭐 뿌리셨어요?" 

커피집 직원이 물었다. 조 말론 블랙베리 앤 베이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을 레이어링해서 뿌린 날이었다. 이렇게 긴 이름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읊어주고 나니 본인이 향수에 관심이 많노라며 우디한 향을 좋아한다고 했다.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 향을 좋아하지만 남자 스킨냄새 같은 면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는데 칭찬을 받으니 갑자기 잉오헤에 대한 자신감이 한껏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분이 말했다. 

"저는 톰포드를 좋아해요."

톰포드라. 니치 향수에 대해 조사할 때 한쪽 귀로 자주 들었던 이름이긴 한데, 조말론에 꽂히는 바람에 다른 쪽 귀로 날아가버린 그런 향수 브랜드였다. 톰포드에도 잉글리시 오크 같은 향수가 있으려나 싶어서 물어봤다.

"톰포드는 뭐가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건 패뷸러스요."

그러나 귀가 어두운 나는 또 잘못 알아듣고...

"히글러스요?" (내가 말해놓고도 어쩐지 굉장히 흉악한 향이 날 것 같은 향수 이름이었다. ㅎㅎㅎ) 

여튼, 그래서 도서관에 오는 길 신세계 면세점들을 지나가다가 톰포드에 가서 한번 맡아본, 톰포드 XX 패뷸러스.

톰포드 패뷸러스는 사실 차마 부르지 못할 이름을 가지고 있는 향수였다. 마치 디자인인 것처럼 빨간 줄로 그어진 저 부분에는 사실....

원래 이름인 욕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ㅋㅋㅋㅋ 아니 향수 이름에 F-word 를 넣으면 어떻게 부르란 말이냐. 그래서 70년대도 아닌데 한국에 들어올 때 검열을 거쳐 F단어 에 빨간 줄을 그어 들어온, 톰포드의 패뷸러스 (영어이름은 퍼킹 패뷸러스, 직역하면 '겁나 멋짐' 정도 되겠다).

그래서 어땠냐고? 음. 예상 밖의 냄새가 났다. 일단 조말론의 잉글리시 오크와는 아예 계열이 다르다. 베이스 노트에 화이트 우드가 들어가 있긴 하고 매캐한 향이 나기는 하지만 오히려 조말론으로 치면 Myrr and Tonka 라던가 하는 인텐스 계열 향과 비슷한 느낌이다. 매캐하고 살짝 달달한 바닐라 향이 난다는 점에서는 다크앰버 앤 진저릴리와 비슷하지만 거기에 가죽냄새와 약간의 쇠냄새(?)도 섞인 듯 해서 좀 더 남성적으로 느껴진다. 웬지 아랍 향신료같은 인상은 비슷하다. ㅎㅎㅎ 흔히들 관능적인 향이라고 한다는데 '관능적인 향'이라는 게 뭔지 나는 아직도 당췌 모르겠다. 확실히 화려하고 강렬한 향인 건 알겠다. 하긴 다크앰버 앤 진저릴리도 처음에 맡았을 때는 '읭' 했지만 지날 수록 조금 중독성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으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향수 역시 더 맡다보면 좋아하게 될 수도. 

아래는 노트 정보다. 

탑노트: 라벤더, 세이지

미들노트: 가죽, 바닐라, 비터 아몬드

베이스 노트: 통카 빈, 앰버, 레더, 캐시미어, 화이트 우드. 

 

덧:

왼쪽 손목에는 톰포드의 패뷸러스를, 오른쪽 손목에는 크리드 어벤투스 포 허를 뿌리고 도서관에 왔다. 뿌리자 마자 코를 댔더니 예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상큼한 과일향이 안 느껴지길래... 너무 예전에 과대평가를 했었나? 하고 생각하며 왔는데... 일하다보니 정말 아름다운 미들노트가 훅 치고 올라온다. 이건 사과향이랄지 꽃향이랄지. 은은하고 여성스러운 듯 하면서도 발랄한 그 느낌. 아.. 어벤투스 포 허... 네가 진짜 15만원만 더 쌌어도... (너무 깎았나? ㅎㅎㅎ) 언젠가는 꼭 사고말테다, 치토스. 

덧 2:

양 손목에 두개의 다른 향수를 뿌렸으니 차마 어디에 더 뿌리지는 못하고... 조말론에 갔다가 신상인 파피 앤 발리를 시향지에 뿌려 들고 왔다.  파피 앤 발리는, 예전에 한정판으로 나온 '잉글리시 필드' 시리즈 중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던 향을 온고잉 상품으로 만든 거라고 한다. 잉글리시 필드 시리즈는 한번도 못 맡아보다가, 얼마전 친구가 들고 다니던 그린 어쩌구 (...향수 블로그에서 이게 쓸 표현인가) 가 참 좋았던 기억이 나서 파피 앤 발리도 한번 맡아봤는데... 곡식 냄새 많이 나고 약간은 쿰쿰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조 말론은 참 자연적이어서 좋단 말야. 조 말론 매장에 간 김에 요즘 살짝 눈길을 주고 있던 오우드 앤 버가못도 시향지에 뿌려서 들고 왔는데, 역시 좋다. 다음에는 오우드 앤 버가못 손목에 뿌려봐야지. ㅎㅎ

이사 오고 나니 내 동선에 신세계가 있어서 향수탐방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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